백성 수탈해 갑부로… ‘재벌 반감’ 씨앗 뿌린 민영휘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① 민영휘 부자(1)
이덕일 | 제295호 | 2012.11.04
일제 치하에서 대부분의 식민지 백성들은 가난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거부(巨富)를 일군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치하라고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일찍 감지해 거부가 된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해 거부가 된 민영휘 부자는 경우가 달랐다.

민영휘가 살던 가옥.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 있다. 철종의 사위 박영효도 한때 살았던
주택이다. 민영휘(아래 사진)는 평안감사 때 착복한 재산을 기반으로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민영휘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몇몇 부자사람’은 존재했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은 삼천리 1931년 2월 1일호의 조선 최대 재벌 해부(3)라는 글에서 “현하(現下) 조선에 있어서 누가 제일 갑부냐고 하면 제1 민영휘(閔泳徽), 제2 김성수(金性洙), 제3 최창학(崔昌學)의 세 손가락을 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제일 갑부로 꼽힌 민영휘는 한국 사회에서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착되게 만든 원조였다. 민영휘의 원명은 민영준(閔泳駿)이었는데 1901년 처형된 김영준(金永準)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개명한 것이다. 민영휘의 부친은 민두호(閔斗鎬)인데,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이때 사람들이 민씨 중에 세 도적이 있는데 서울도적 민영주(閔泳柱), 관동(關東:강원도)도적 민두호, 영남도적 민형식”이라고 설명해서 민두호를 왕비 민씨를 등에 업은 외척 도적 셋 중의 한 명으로 지목하고 있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서울도적 민영주를 과거에 급제시킨 인물이 민영휘’라고 말하고 있다. ‘금수처럼 행동하고 도적처럼 약탈’하는 민영주를 대부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민영휘가 고종에게 “민영주를 사람으로 만들려면 과거에 급제시켜 얽어매야 합니다”라고 상주해 급제시켰다는 것이다.
민영휘의 부친 민두호는 춘천부 유수(留守)를, 민영휘는 평안감사를 역임하는데 이때 강원도와 평안도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한 것이 조선 제일 갑부가 된 원동력이었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춘천부 유수 민두호의 탐학 때문에 강원도민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면서 백성들이 그를 ‘쇠갈고리 민두호[閔鐵鉤·민철구]’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민영휘는 민씨 척족 정권 때인 고종 13년(187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탐관오리의 길로 들어섰다.
형조참의 지석영은 ‘민영휘 처형’ 상소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영휘(영준)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남정철(南廷哲:망국 후 일제로부터 남작 수여)이 과거 급제 2년이 채 안 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왕비의 친척이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귀한 자리에 나간 것은 근세에 없던 일이었다. 그가 평양 감영에서 계속 진헌(進獻:뇌물을 바침)하자 고종은 충성으로 생각해서 영선사(領選使)로 뽑아 천진(天津)으로 보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閔泳駿:민영휘)이 남정철의 자리를 대신한 후 작은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금으로 주조해서 바치자 고종은 얼굴색이 변해서 ‘남정철은 참으로 큰 도둑이었군. 관서(關西:평안도)에 금이 이렇게 많은데 그가 혼자 독차지했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총애는 쇠퇴하고 민영준은 날로 중용되었다.(매천야록, 갑오이전)”
민영휘가 바친 금송아지가 평안도 백성들의 고혈이라는 사실을 모른 체했던 고종은 민영휘를 크게 총애했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집이 불타기도 했지만 고종의 신임은 식지 않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자 이조참의, 도승지 등으로 계속 승진시켰다.
민영휘에게도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한 번은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일본이 김홍집 등의 온건개화파를 내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였다. 이때 민씨 척족들이 ‘동학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몰려 몰락하고, 민영휘도 전라도 영광군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이 무렵인 고종 31년(1894) 전 형조참의 지석영(池錫永)은 민영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신이 전국의 모든 입을 대신해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정사를 전횡하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해서는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고는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자가 간신(奸臣) 민영준(閔泳駿:민영휘)으로서……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고종실록, 31년 7월 5일)”
지석영의 말대로 민영휘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의 탐학이 전국적 농민봉기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영휘는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이는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민씨 척족이 무너지자 민영휘는 유배지로 가는 대신 청나라 군대에 숨어서 청나라로 도주했다. 이 첫 번째 위기는 고종이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의 갑오개혁 내각을 무너뜨린 몇 달 후 특지로 징계를 면해주면서 벗어났다.
고종은 재위 38년(1901)에는 민영휘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해 왕실 업무를 관장시켰고,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기 직전인 재위 42년(1905) 3월에는 정1품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임명하고 10월에는 태극장(太極章)까지 하사했다.
그러나 민영휘에게 고종은 이(利)를 위해서 맺어진 사이일 뿐이었다. 민영휘는 왕후 민씨의 총애로 성장했지만 막상 민씨가 죽고 엄비(嚴妃)가 고종의 총애를 받자 백관을 사주해 엄비를 황후(皇后)로 책봉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한 게 그의 성향을 잘 말해준다.
은행·학교 경영 통해 이미지 쇄신 노려
1907년 10월 일본 왕세자가 방한하자 민영휘는 신사회(紳士會) 환영위원장을 맡아 재빨리 일본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민영휘를 계속 총애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12월 20일자 논설에서 ‘국사(國事)가 지금에 이른 것은 민영휘와 조병갑의 탐학이 한 원인’이라고 비판했지만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순종에게 강제 양위를 당하기 넉 달 전인 재위 44년(1907) 7월 민영휘에게 궁내부 특진관(特進官)과 상방사(尙方司) 제조를 겸임시켰다.
민영휘의 두 번째 위기는 1907년 고종이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강제 양위당하면서 찾아왔다. 고종이 힘을 잃자 민영휘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재산을 되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매천야록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민영휘(閔泳徽)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 백성의 재산을 탈취해서 전후에 거만(鉅萬)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들어 혹 재판소에 호소하기도 하고 혹 그의 집으로 달려가 칼을 빼어 들고 되찾아오기도 하였다. 또 각 신문에다가 그의 오랜 악행을 날마다 게재하자 민영휘는 이를 걱정해서 변호사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소송을 받지 말게 했다. 또 신문사에도 애걸하여 그 악행을 숨기려 했지만 신문사에서는 그가 애걸하면서 은폐하려 했다는 것까지 함께 보도하자 민영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가족을 모두 상해(上海)로 데려가려고 하였다.(매천야록 1909년)”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1908년경부터 민두호·영휘 부자에게 재산을 빼앗긴 백성들이 부자를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08년 안주의 이소사는 민영휘가 평안감사일 때 남편 김희정을 협박해 빼앗은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승소했다. 공립신보는 1909년 1월 27일자에서 민영휘의 말로란 제목으로 ‘평안감사 재직 때 토색질한 수만금에 대해 억울하게 빼앗긴 백성들이 민씨 집에 답지해서 빼앗긴 물건을 환수하려 하므로 장차 가산이 탕패될 듯 하다더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재빨리 일제로 말을 갈아탄 민영휘를 백성들이 이길 수는 없어서 이소사의 소송도 2심에서는 민영휘가 승리했다. 일제 통감부문서(1909년 7월 26일)에 따르면 민영휘는 일본 왕가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千照大神)를 신봉하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의 고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민영휘는 망국 직후인 1910년 10월 일제에게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은 데 이어 이듬해 1월에는 이른바 은사공채(恩賜公債) 5만원을 받았고,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도 받았다.
민영휘는 탐관오리로 축재했지만 한일은행(훗날 東一銀行) 은행장(1915)도 역임하는 등 돈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휘문의숙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을 통한 이미지 쇄신도 꾀했다. 민영휘는 1931년 6월 80 노구로 여의도 조선비행학교를 시찰한 후 비행기를 타고 서울 장안 상공을 비행 유람하는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1935년 12월 30일 관훈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남긴 1000만여원의 재산을 둘러싸고 소송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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