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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반 고흐는 왜 우키요에에 빠졌나

반 고흐는 왜 우키요에에 빠졌나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타향살이하는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에 급급했던 1887년 3월,
반 고흐는 파리 클리시가(街)에 있는 카페 르탕부랭(Le Tambourin)에서
자신이 수집한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畵)를 전시하고 있었다.

당시 반 고흐가 전시기획자 겸 컬렉터로서 이런 전시를 꾸밀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구필화랑의 점원, 즉 화상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반 고흐에게 우키요에 소장품전은 자신의 취향을 뽐내는 개념미술전 같은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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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1603~1867)의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풍속화로 보통 목판화를 뜻한다.
우키요(浮世)는 ‘뜬세상’, 즉 덧없는 세상이라는 의미이다.
극장, 식당, 사창가 등으로 쾌락을 찾아 모여드는 사회 계층의 습속을 담은 그림이다.

유럽에 우키요에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54년이었으며,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는 자포니즘(japonisme)을 유행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엑스포를 통해 일본의 민예품이 대거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우키요에 판화는 구겨지고 뭉쳐져서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완충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우키요에는 잡지나 전단지처럼 가볍게 취급되었고,
유럽으로 수출되는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구겨진 우키요에를 펼쳐보던 화가 겸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은 충격을 받았고,
친구인 마네, 드가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보라! 한낱
포장지에 불과했던 우키요에가 희귀하고 신비로운 보물로 격상되는 순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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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고흐가 모사한

안도 히로시게의 매화 그림.



우키요에의 어떤 점이 인상주의자들을 매료시켰던 것일까?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림을 그리는 데 너무나 원칙주의자였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키요에는 화면의 중심에 꼭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
명암 구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강박,
그림의 중심이 되는 인물(사물)을 그릴 때 그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 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
현란한 색채와 확고한 윤곽선,
그리고 날렵한 선묘로 구성된 평면적 화면은
사물을 꼼꼼하게 묘사하지 않았음에도 경쾌하고 선명하다는 점,
역원근법을 비롯해 인물이나 사물을
엉뚱한 각도(예컨대 조감법이나 부감법)로 포착해서 그려냈다는 점에 깊이 매료되었다.
   
   반 고흐는 그 어느 인상주의자보다 우키요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가 우키요에에 이끌렸던 것은 물론 그 독특한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시대에도 유럽국가 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을 했다.
반 고흐는 일찍부터 일본으로부터 온 도자기, 공예품, 우키요에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미술에 대한 열광은 1886년 파리로 옮겨온 뒤에 시작되었다.
파리에 오기 전 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은 암울한 그림을 그렸지만,
파리 정착 후 차츰 그림이 밝고 화사해지기 시작했고, 그 원인은 바로 우키요에였다.
   
   반 고흐가 파리에 와서 일본 판화와 더욱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엄청난 독서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에 와서도 자주 헌책방을 순례했는데,
매일 새로운 보물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만끽했다.

특히 일본 그림의 복제화들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 놀라운 세계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경도되었다.
우키요에 색채의 거친 화사함이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우키요에의 파격적 아름다움은 반 고흐가 어두움과 침착함에서 벗어나도록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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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기영감(Father Tanguy), 1887~1888년, 캔버스에 유채, 92x75㎝, 로댕미술관

 

반 고흐는 자신의 새로운 예술이 인상주의적이며 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 고흐가 우키요에에 매료되기 전 그의 가장 큰 스승은 밀레였다.
그런데 우키요에를 만나고 나서,
아버지와 비교할 만큼 영원한 우상으로 떠받들었던 밀레를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죽기 얼마 전 초심으로 돌아가 밀레를 모사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우키요에에 빠진 후 반 고흐는 더 이상 밀레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지도 않았고,
제자가 아닌 듯 행동하기도 했다.
   
   특히 1888년 반 고흐의 아를행(行)은
일본의 승려화가들처럼 이상적인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 의도였다.
그는 남불(南佛)을 일본과 동일시했다.

물론 일본에 가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건조하고 바람이 강한 아를의 기후는 일본의 습한 기후와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를의 태양과 화창한 기후, 그리고 푸른 하늘이 아주 좋다며,
항상 이렇다면 그곳이 화가들의 낙원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고,
정말 ‘일본 같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반 고흐는 안도 히로시게와 같은 유명 판화가의 우키요에를 모사하고,
자신의 작품에 배경으로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우키요에의 가장 혁신적인 방법론을 인용하고 실험했다.

반 고흐는 일본 미술을 연구하면,
너무나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철학을 만나게 된다고 언급하면서,
일본적인 감각과 묘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특히 ‘탕기영감’의 뒷배경은 거의 우키요에로 가득 차 있다.
물감이나 캔버스 등 그림재료를 작품과 자주 교환해 주었던 맘씨 좋은 화구상이었던
탕기영감 역시 우키요에를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세 점이나 그렸을 만큼 애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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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고갱에게 바치는 자화상, 1888년, 캔버스에 유채, 52x62㎝, 포그미술관
 
또한 아를 시절 고갱에게 헌정한 자화상은 반 고흐의 일본 취미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고갱에게 자화상을 보내며 “일본의 승려같이 머리를 짧게 깎은 저의 모습입니다.
이미 이 세상의 속된 것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아닙니다. 그 먼 곳에서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부처님을 동경하는 엄숙한 불자의 눈동자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반 고흐는 ‘영원한 부처를 숭배할 뿐인 승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과장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하면서,
자화상을 그리면서 유일하게 고친 부분이 ‘눈을 일본 사람처럼 약간 길쭉하게’ 그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 고흐는 아를에서 고갱과의 동거가 난관에 빠지자,
그가 추구하던 이상향도 물거품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후 그는 점차적으로 ‘일본’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고갱이 떠났듯이 우키요에에 대한 그의 사랑도 시들고 있었던 것일까.
   
   혹자는 반 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을 두고 맹목적 왜색 찬양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혹 반 고흐가 조선민화에 환장(?)했더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반 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은 단순히 일본 문화에 대한 찬양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낭만적 예술가의 전형인 반 고흐에게는 지금의 척박한 현실의 땅이 아닌 새로운 이상향이 필요했다.

일본은 반 고흐에게 멋진 것, 훌륭한 것, 이상적인 것을 투사할 만한 가장 완벽한 대상이었다.
그러니 실제 일본과는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은 그저 반 고흐에게 가장 먼 곳이자 미지의 세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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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
   
홍익대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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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m Park in Kameido (亀戸梅屋舗, Kameido Umeyashiki) : 1857 / 11


Plum Park in Kameido is a woodblock print in the ukiyo-e genre

by the Japanese artist Hiroshige. It was published in 1857 as the thirtieth print in the

One Hundred Famous Views of Edo series and depicts Prunus mume trees in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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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h in color and theme this print is related to print no. 27 (Plum Orchard in Kamada);

copied by Vincent van Gogh under the title Japonaiserie: Flowering Plum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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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의 해외로의 영향


1851년 런던에서 전시회가 열린 이후 우키요에는 19세기 유럽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명암이 적고 평면적이며 색이 강렬하다.

몇몇 작품들은 검은색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강한 대비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키요에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이후부터 19세기 유럽 화가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미술 이론을

거부하고 새로운 작품과 화가로서의 개성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첫 기반을 다진 것이 인상파였다.

 

인상파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메리 카사트, 에두아르 드가,

그리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뚤르즈 로트렉, 폴 세잔느, 빈센트 반 고호,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들은 우키요에에게서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1865년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몽이 도자기의 포장지에 있었던 '호쿠사이 만화'를

친구들에게 돌려서 보여준 것이, 인상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고흐의 '탕기(Tanguy) 할아버지'라는 작품의 배경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고,

히로시게의 그림이 유화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나,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이 작품은 배경이 없고 명암이 적으며 검은색과 붉은색을 대비한 강렬한 색으로 그려져 있어

유럽의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우키요에의 강렬함과 단순함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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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탕기(Tanguy) 할아버지'라는 작품의 배경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는 모습

 


클로드 모네의 작품 '에밀 졸라의 초상' 또한 배경의 벽에 우키요에 작품이 보이고 있다.

모네는 또한 일본의 우키요에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평면적인 그의 작풍 스타일 또한 우키요에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게다가 자포니즘의 영향과 일본 미술을 취급하고 있었던 빙에 의해

아르 누보에는 우키요에 등의 평면적인 의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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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바다'


드뷔시는 이 곡을 작곡할 때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란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는 '우키요에'의 대표작이다.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 초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약 200년 동안
에도에서 유행했던 민간 풍속화다.


클로드 드뷔시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神奈川沖波裏)를 보고 자극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는 등(서재에 그림이 걸려있는 모습이 확인되는 사진이 있음),

클래식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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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가 작곡한 "바다"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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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츠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후지산 36경" 중의 하나인 "가나가와의 파도"


로망 롤랑이 '꿈을 그리는 위대한 화가' 라고 격찬했던 클로드 드뷔시 (1862~1918) 는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다.

그가 2년여 걸려 완성한 야심작 '바다' 는 드뷔시가 쓴 최대 규모의 관현악곡. 
 '3개의 교향적 스케치' 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평론가 데이비드 콕스는 이곡을 가리켜 '프랑스 작곡가가 쓴 최고의 교향곡' 이라고 극찬했다.

드뷔시의 전기를 보면 그가 배를 타본 것은 영국을 다녀오기 위해 도버 해협을 왕복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선원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바다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다.
말하자면 바다는 드뷔시의 '오랜 친구' 였다.

드뷔시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9세 때 아버지가 혁명 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됐다.
그 때문에 드뷔시는 해변가의
외할머니 댁에서 자라났고,
바닷가의 고독한 산책을 통해 드뷔시는 파도와 끝없는 대화를 나눴다.
드뷔시는 늘 바다와 비를 좋아했다.


드뷔시가 이 곡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1902년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접한 영국화가 조셉 터너의 '비, 증기, 속도' 를 보고 나서부터다.

드뷔시의 '바다'는
1악장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2악장 '물결의 희롱',
3악장 '바람과 바다의 대화' 등 3부로 된 인상적 스케치이다.

‘스케치’가 아니라 ‘인상적 스케치’라고 한 데 주목해야 한다.
이 곡은 묘사적인 곡이 아니다.
내적 또는 개성적인 인상,
바다라는 대상이 작곡자의 마음에 자극하여 일어나는 반영을 환기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현실의 바다가 아니라 바다의 인상을 중심으로 하는 드뷔시 자신의 환상을 그렸다.


1악장이 바다의 신비스런 원경 (遠景) 이라면,
2악장은 파도의 숨결이 클로즈업 돼 피부에 와닿는다.


그래서 작곡가 겸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는
섬세한 프리즘과 과감한 생략이 돋보이는 2악장을 높이 평가한다.


3악장은 질풍노도와 같은 낭만적 격정이 다채로운 음색의 팔레트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은 일본 화가 호쿠사이가 그린 '가노가와의 큰 물결' 을 보고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도가 주는 공포감과 에너지는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묘사한 바다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이 곡을 가리켜 작곡자 자신은 '형체가 없는 바다 풍경' 이라고 말했다.

화성.선율.리듬.형식 면에서 종래의 개념을 타파, 불규칙 리듬에다 형식이 거의 없는 게 특징.
1905년 파리 초연 당시 '논리적 형식이 결여돼 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드뷔시의 관현악곡으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과 함께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다.

드뷔시는 이 곡을 1905년 3월에 완성해 그해 10월 파리의 라무뢰 관현악단의 연주회에서 초연됐다.

평소 드뷔시의 급진적인 음악을 배격해오던 일부 청중들이
고양이 소리나 휘파람 소리, 또는 바닥을 두드리며 장내를 소란케 했다.
자크 티보가 등장해 바흐의 샤콘느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겨우 진정되었다 한다.

1908년 1월 19일과 26일의 이틀에 열린 드뷔시 자신이 코튼 관현악단을 지휘한 연주회에서는
대단한 갈채를 받았고 이어 다음해, 2월 1일의 런던에서의 연주회도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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