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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6.25 전쟁


 

 

이야기 6.25 전쟁

제 178호 조찬강연(170회)

挑戰과 應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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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俊 逢
전 육군대학 총장
전 광운대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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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12기/ 미 육군 정훈학교(Fort.Slocum, N.Y)
미 육군 민사군정학교(Fort. Gordon, Ga)
연세대학교 교육심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행정학석사)
경남대학교 대학원(행정학 박사)

국방부 전략기획국 전략기획과장/ 군단참모장
군 작전처장/ 사단장/ 육군본부 정책기획실장
육군대학 총장/ 한국공항공단 이사장
세계민간 공항협회 이사, 부회장,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장
광운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 광운대학교 대학원장
동북아공동체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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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통솔-그 실제와 본질/ 닻을 올리기
전에/ 예화중심 리더십/ 이야기 남북전쟁 1.2권
국가위기와 대통령의 역할/ 한국전쟁의 진실 상, 하

*********

현직에 계시면서 국가의 중책을 맡아 많은 수고를 하시고 현직을 떠나 지난 20년 동안 이 연구원을 가꾸어

오신 안무혁 이사장님과 아침 일찍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신 회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페르시아의 왕은 전쟁 상황에서 어느 전투에서 패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을 즉각 처형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정신병자들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현상을 현상대로 보고 하는데 보고하는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사실을 보고하는 전령을 왜 죽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페르시아의 왕들만 정신병자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 뒤 다른 서적을 보다 보니까

1941년 6월 23일 소위 바바로사 작전이라고 하는 명칭으로 160개 사단을 동원해서 소련을 공격한

히틀러의 정보 책임자인 카나리스라고 하는 제독이 개전 직후에 정보 팀을 모스크바 주변에 공중침투를 시켰는데

침투된 정보원들의 보고가 '개전 직전 소련의 사단 수'라든가 전투능력을 평가한 것보다도 평가에 들어있지 않은

100개 사단이 돌연 어디서 출연했는지 모스크바 전방에 나타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나리스 제독이 히틀러에게 보고를 하니까

히틀러가 뭐라고 반응을 보였는가 하면

"소련군 100개 사단이 모스크바 전방에 나타나면 안돼."

라고 했습니다.

히틀러가 안 된다고 해서 100개의 사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조치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카나리스 너는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고 해버린 것입니다.

독일이 가지고 있던 200개 사단이 넘는 정예사단 가운데에 150개 사단을 투입한,

전 병력의 70~80%를 투입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북아프리카, 이태리,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전선이 확장되어 있는 전선의 총 정보책임자인 카나리스를 안 만나겠다고 한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전령을 처형했지만,
히틀러는 처형을 하진 않았지만 처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 총 사령관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죽은 생명 아닙니까.
저는 이 페르시아의 왕과 히틀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요즘 경제학에서는 '몰입 상승'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몰입 상승'과 같은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어떤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다 변동사항이 생기면 이것을 피드백해서 변화되는 요소를 넣어서

계획을 조정해 가면서 추진을 해야 하는데, 절대권력을 가졌거나 나름의 선입견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이러한 특질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인푸트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원래 가졌던 자기의 고정관념이 그대로 현실이라고 밀어 붙이다가
그대로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저 나름대로 분석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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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일주일 앞두고 제가 강연을 하는 서두에
이 두 가지 예를 드는 이유는 한국전쟁

과정에도 이것과 똑 같지는 않지만 이것과 유사한 현상이 중요한 우리의 현재 운명과도 연결되는 의사결정, 정책·

전략 결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 점을 특별히 제가 예화를 들고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소위 진보다 뭐다 하는 여러 곳에서 되지도 않는 여러 소리들을 많이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38선은 누가 만들었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선 제가 명확하게 자료 제시를 하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육군 수가 16만 5천 명입니다.

세계 랭킹 육군 수로만 따지면 17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전쟁할 때 동원하고
전쟁이 끝나면 동원을 해제해서 현역 병력을 별로 두지 않는

역사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대서양과 태평양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방지역에가다 보면 개천 같은 곳에 방벽을 쌓고 도로에 돌을 쌓아 전차가 들어오면 막는다고 하는데

태평양과 대서양이라고 하는 이 바다는 미국 안보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 미국이 가만히 있을 테니 상륙작전을 해오라고 해도 지구상에 5개 사단이나 10개 사단을 승선해서 미국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6천마일(만 킬로미터)이 되는 태평양과
3천마일(5천 킬로미터)이 되는 대서양을

십만, 이십만의 병력을 실어 나르고 군수 지원을 계속 한다는 것은 미국이 아니고는 다른 나라가 할 수 없는,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100키로, 200키로의 병참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북쪽의 캐나다는 인구도 적고 군대도 적고 우호적인 나라입니다.

멕시코도 술이나 한잔 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 도전적이고 전쟁에 강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국가의 안전에 대해서 큰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리버 크롬웰이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서 10년 간 군정을 실시하고
육군 소장이 도지사로 나가서 통치했던

영국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조상들은 평시에 현역을 갖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독립 전쟁 후 조지 워싱턴은 현역을 80명 남겨두고 전부 제대를 시켰습니다.

80명은 오늘날 피츠버그의 군수품 관리와 웨스트포인트 경비에 80명의 현역을 존속시켰던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미국이 군대를 1400만 명으로 증강시켰습니다.

육군만 825만 명이었습니다.

16만5천 명에서 825만 명으로 팽창을 하니까 미국 군대에,

우리가 기억하는 장군들은 준장에서 대장이 되거나 중간 계급 두 계급을 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6만 5천 명이던 군대가 800만 명이 넘었습니다.
미국 해군은 450만 명이 넘는 규모로 확장이 되었습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동안 만든 항공모함 수만 147척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만들려고 해도 만들기 어려운 항공모함을 147척이나 만든 것입니다.
항공기도 30만대나 제작을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능력입니다.
미국의 GNP는 평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최소 당시 전 세계 GNP의 50~70%를 미국이 담당했습니다.

미국이 군수 창고가 되어서 2차 세계대전을 치룬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치룬 미국의 방대한 군을 한국전쟁이 나기 전 얼마로 줄였는가 하면

육군만 100개 사단이던 미국이 9개 사단으로 줄였습니다.

육군 병력의 8%만 남겨두고 모두 동원 해제를 해서 자기들 직장으로 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6.25를 맞은 것을 우리가 알고 얘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

오키나와 전투에 상륙작전을 하면서
미 해병대를 비롯해서 손상된 것이

49, 151명의 사상자와 368여 척의 함정이 파손되고 36여척의 함정이 격침되었습니다.

이곳에 제 연령대 이상 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소위 말하는 가미가제 특공대, 신풍특공대라고 하는 자살

특공대가 연돌로 돌격하여 침몰되고 부서지는 것을 겪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 본토 상륙작전을 할 때는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기다 만주의 관동군이 본토 방위에 들어오는 날이면
최소한 희생이 얼마나 날것이라고 예측을 했는가 하면

100만 명의 희생이 난다고 본 것입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쟁을 치렀지만 전사자는 40만 명이었습니다.

그만큼 미국은 인명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전쟁 막바지 일본을 상대로 상륙작전을 하면서

100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감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표를 얻어야 집권을 하기 때문에

많은 젊은 사람들이나 자식이나 남편을 죽이는 사람에게 표를 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명을 어떻게든지 살려야 되겠다는 것은
비단 정치적으로 표를 얻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건국정신이나 기독교 정신에 의해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미국의 정신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가능하면 100만 명의 희생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하니까
소련 군대를 극동으로 불러서 관동군을 견제해서

만주에  잡아두면 상륙작전의 희생이 100만 명이 나지 않고 40만이나 50만 명으로 줄지 않겠느냐는 것이

미국의 계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스탈린이란 사람이 포커페이스를 잘 해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계산을 하고 있었으므로 상륙작전 계획을 세웠는데 어떻게 세웠는가 하면

큐슈 쪽에 13개 사단으로 1945년 11월 1일에 상륙작전을 하도록 계획을 세워서이것을 '올림픽 작전'이라고 명명하고

요코하마, 동경 근방에 23개 사단을 가지고 상륙작전을 해서 1946년 3월 1일에 상륙작전을 하기로 계획을 하고

작전명은 '코르넷 작전'이라고 이름 지어서 준비를 하면서 일방은 소련의 극동 참여를 종용했던 것입니다.

우선 자기들의 병력의 희생을 적게 내겠다는 일념이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5월에 히틀러가 패망하고 그해 7월에 포츠담에서 회담이 열렸을 때에,

회담 중에 미국의 핵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트루만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동맹관계이니까 스탈린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이러한 굉장한 무기가 있다고 하니 이것을 일본에 떨어뜨리는 날엔 일본이 바로 항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전쟁이 나기 직전에 일본과 소련 간에는 중립 조약이 체결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소련이 중립조약을 맺은 사이니까
연합국 가운데에서는 가장 가깝다고 생각을 하고 항복 중재를 해달라고

소련에 부탁을 했는데 스탈린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국면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7월에 핵실험이 성공하고 미국이 조만간 이길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소련은 기본적으로 육군 국가입니다.

**********

1944년 12월 현재로 소련이 가지고 있는 육군은,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48개 야전군 500개 사단이었습니다.

500개 사단 안에는 아무 무장도 하지 않고 폐품 옷을 입혀놓고
거의 맨발로 편성되어 있는 사단도 있었습니다.

이 사단은 무엇인가 하면 지뢰제거 사단입니다.

지뢰제거 사단은 무엇인가 하면 지뢰지대에 맨발로 들어가서 하나 터트려서 죽는 것이 임무입니다.

지뢰지대를 안 들어가겠다고 하면 뒤에서 총을 들이대고 사격을 해 죽이니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소련 사람들은 인간을 관리했습니다.

1945년 5월 엘베강에서 만난 주코브에게 아이젠하워가

"소련군에 지뢰제거 사단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사실이오?"

하고 물으니까 주코브가

"당신네들 미국사람들 이상한 기계를 가지고 찾아다니는데 그러다가 사람들 더 많이 죽어.

우리처럼 사람을 투입시켜 펑펑 터트리면서 가는 것이 더 빨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150만 명을 13만 6천여개의 객차에 실어서 모두 만주 가까이로 옮겨놓고

1940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나니까 이틀 후에 바로 병력을 투입하여

우리나라 웅기에 들어온 것이 8월 10일입니다. 원산에 들어온 것이 8월 16일입니다.

그 당시 미국은 군대가 한반도와 제일 가까이 있었던 곳이 오키나와였습니다.

소련군은 그대로 내려와서 금방 평양 38선 까지 모두 들어오고

미국 군대가 인천으로 들어온 것은 9월 중순이 되어서였습니다.

남한에서는 9월 중순이 될 때까지 일본군이 그대로 행정하고 그대로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진 것은 알지만 일본의 무장해제를 시킬 능력이 우리 국민에게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실정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육군은 191개 사단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국방부나 육군본부 등에서
우리나라 사단을 서른 개로 하느냐, 사십 개로 하느냐,

경제적 운영에서 몇개를 줄인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저 사람들이 도대체가 일본이 지금부터 60년, 70년 전에 191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나 모르나,

지금 40개, 50개 사단을 가지고 따질 때인가,

중국, 러시아, 일본 같은 강대국들과 북한에 둘러 싸여있는 한국이 어찌하여 그렇게 안목이 좁은가."

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소련이 군대를 가지고 극동에 들어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면
카이로,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문제를

논의한 것에 소련이 합법적으로 관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 여기에 출병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국 문제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는 하등의 법적 근거가 없고

북한을 자기들이 점령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에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자기들 상호간에는 누가 소련을 끌어들였는지에 대해

맥아더와 마샬 사이에 은연중에 개인적으로 앙금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서 총 책임을 진 것은 맥아더이고
그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조지 마샬 이었습니다.

희생을 적게 하기 위해서
맥아더가 5사단 23연대장을 지낸 폴 프린먼이라는 대령이 2차 세계 대전 중 워싱턴으로

가는 출장 편에 조지 마샬에게 두 가지 부탁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는 꼭 소련이 극동에 참전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대만을 공격해 대만을 기지로 해서 일본으로 진출하는 대신 필리핀을 공격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필리핀을 떠나면서

“아이 리턴"

이라고 자기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건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부분이라 마샬과 맥아더의 관계를 잠깐 이야기 하겠습니다.

*****************

태어난 해는 같습니다. 1880년생입니다.
한국전쟁이 났을 때 둘 다 70세였습니다.

그런데 맥아더는

첫째, 1802년 미국 웨스트 포인트가 생긴 이래로 4년 간 모든 성적의 평균이 98로 그 기록을 깬 사람이 없었습니다.
둘째, 그 아버지가 아더 맥아더라고 미국 건국 이래로 12번째 중장이 된 사람입니다.
필리핀 군정장관을 지내고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북전쟁이 났을 때 17살에 중위가 되고 19살에 대령이 되었습니다.

미쇼너리 릿지라는 전투에서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용기를 발휘해서
한 전투장을 패전에서 승전으로 바꾸어서 중간 계급 없이 중위에서 대령으로 승진하고 만 21세가 되기전 1년 반 사이에 9개 전투에 참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정규군 소위가 되었습니다.

미국 군대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위를 23년 간을 단 뒤 소령, 중령으로 서부에서 활동하다가

미·서 전쟁이 일어나니까 다시 준장이 되고 성공적으로 필리핀 공략을 해서 중장이 된 것입니다.

필리핀을 공략하던 때에 데리고 있던 참모나 막료들이 다음에 국방장관, 참모총장을 하면서

아들 맥아더에게는 미국 역사상 유일한 특전을 주었습니다.

어떤 특전인가 하면 사관학교를 나온 다음에 보수교육을 하나도 안 받았습니다.
맥아더를 가르칠 교육기관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맥아더는 교관만 한다고 해서 특강만 다녔습니다.
임시 계급에서 전쟁이 끝나면 영구 계급으로 강등이 됩니다.
그런데 맥아더는 임시계급 준장을 1차 세계대전에서 달았는데

임시계급을 바로 영구계급으로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마샬은 2년 먼저 임관을 했는데,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 아닙니다.

남부 웨스트 포인트라고 해서 버지니아 군사대학 출신인데

마샬은 대령이었다가 소령이 되어버리고 맥아더는 준장이었다가 준장이 된 것입니다.

마샬이 준장이 되는 데는 18년이 걸렸습니다.
맥아더가 참모총장일 때 마샬은 포트 베닝 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화기학 처장을 한 뒤 부교장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준장이 된 것은 1936년입니다.
맥아더는 1930년에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맥아더에게는 총장의 임기가 없다고 하여

규정 외에 특별 명령으로 조치를 한 것으로 1937년 까지 미 육군 총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전역을 하면서 필리핀 정부에서 초청을 해서 필리핀 원수가 된 것입니다.
옥으로 된 파이프는 필리핀 원수 때 즐겨 빨던 파이프입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참 이상합니다.
맥아더는 1937년에 미국 군대를 떠났지만, 마샬은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1939년에 마샬이 육군참모총장이 됩니다.

그래서 1939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1945년 까지 6년 간 총장을 하면서

자기가 보병학교에서 교육 받으러 오는 장교 하나하나를 관찰해서 수첩에 적었는데,

그 수첩은 미국 군대에서는 굉장한 수첩입니다.

하나하나 기록해서 언젠가 미국 군대가 확장이 되어서 일을 할 때가 오면,

쓸 사람들을 그때부터 체크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체크한 사람 가운데
아이젠하워, 리치웨이, 클라크 등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지명해서 장군이 된 사람이 160명입니다.
한국 전쟁 때 참모총장을 지낸 콜린스 같은 사람은 1936년에 대위였는데 1940년, 41년에 군단장을 시켰습니다.
몇 개 계급을 뛰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이젠하워도 소장, 중장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중장을 주었다가 바로 대장을 주어서 구라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1944년 아이젠하워가 구라파 총사령관을 하려고 하니까

몽고메리 영국 원수와 경합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총사령관을 몽고메리 원수로 해야 한다고 하니까

미국도 원수 제도를 채택하고 마샬에게 1944년 12월 16일 원수 계급장을 달아주고 맥아더에게는 그 이틀 후인

18일에 원수를 시켜서 마샬과 맥아더의 순서를 바꾼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맥아더의 그러한 부탁을 받으니까

마샬로서는 자기가 중령 달고 있을 때 참모총장을 하던 사람이니까 그 부탁을 안 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탁을 들어주었으니까

그것이 마샬의 책임이냐, 맥아더의 책임이냐를 놓고 서로가 생각할 때는

"결정을 네가 했지 않느냐.",

 "네가 부탁을 했지 않느냐."

하는 묘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

초전에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략했다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6.25는 초전부터 중공군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군이라고 말을 하지만 북한군의 1/3은 중공군입니다.

왜 중공군이냐?
한국 학생들이 학병 하다가 도망치면서 간 곳이 어딥니까?
팔로군(중공군)에 많이 갔습니다.

그래서 6.25가 나기 전에 한국 사람이면서 팔로군에 간 사람들을 모아서 만든
완편사단, 사단장 이하 일등병까지

모두 한국 사람인데 중공군 역할을 해서 삼년 사년 전투경험을 쌓은 사단이 두 개가 있습니다.

이것이 북한군 5사단, 6사단입니다.

그 다음 연대장 이하 전 연대병력이 한국인인데

중공군으로 편제되어  일본군과 싸우고 장개석 군대와 싸운 연대가 두 개 있습니다.
이 연대를 중심으로 만든 사단이 1사단과 4사단입니다.

1, 4, 5, 6사단은 중공군이지 북한군이 아닙니다.

중공군 복장입고 중공군과 같이 싸우고 중공군 편성을 해서 4, 5년 전투경력을 쌓은 것이

중공군이지 어떻게 북한군입니까?

얼굴이 한국 사람이라고 우리 한국군입니까?
이 사람들 4만 5천명의 한국인 중공군이 주력이 돼서 6.25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대전이 함락될 무렵에 이미 전주까지 전진했던 사단이 북한군 6사단입니다.
이것은 사단장부터 말단까지가 중공군에서 몇 년간 전투를 해서 그 편성을 가지고 전투를 한 사단입니다.
이 사단이 목포로 가서 목포에서 진주, 마산 쪽으로 들이밀었던 사단입니다.
창녕 쪽으로 밀고 밀양으로 해서 부산을 향한 사단은 4사단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특수임무는 전부 중공군 사단들이 맡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머리에 두고

 "그 당시 왜 한국군은 형편없이 당했나."

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군에는 미국 군대에서 대위생활 한번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국 군대에서 소대를 편성해서 소대를 지휘했던 간부도 없었습니다.

만주와 한국이 붙어있기 때문에 뜻있는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이 일본 군대에서 도망쳐서 갈수 있는 곳이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나 중국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미국의 참전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가 있지만
저는 오늘 아침에 처음 예를 든 것처럼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에 미주리주 인디펜던트시 자기가 원래 농사를 짓던 자기 집에 가 있었습니다.

북한 침공을 알리고자 애치슨이 전화를 거니까
딸 마가렛이 받아서 트루먼을 바꿔 주었는데,

애치슨이 북한이 남한을 공격했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트루먼의 첫 답변이

(어떻게 하든 그 놈들을 막아야 해) 이것이 첫 반응이었습니다.

이 첫 반응이 한국에 미국군 투입을 결정한 것입니다.

트루먼은 고등학교 출신입니다.
애치슨은 하버드 출신입니다.

애치슨은 1950년 1월, 프레스 센터에서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때 만약 트루먼 대통령이

“그래, 애치슨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라고 물었다면 애치슨은

“절차에 따라 의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고를 받는 순간에

‘son of a bitch'

까지 나오니까 애치슨이 뭐라고 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때 한국에 대해서 병력투입은 결정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미국이 참전하는데 있어서 6월 27일 해·공군은 38선 이남에서 즉각 돕기로 결정이 내려져서

미국 거류민 철수와 한국군의 탄약을 운반해 준다든가 하는데 바로 투입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상군 투입이었습니다.

지상군 투입이 안 되고는 전쟁에서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은 우리나라 전방 사단에서
농사를 짓는데 도와준다고 빼고, 휴가라고 빼고 해서

3개 사단 1개 연대가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나마 병력이 제대로 있지 않고 많은 병력이 빠져 있었고

공격을 받고도 전면전이라는 것을 판단하는데 무려 6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평상시 상황인줄 알고 우왕좌왕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작전 국장이 육군 본부에 나타난 것이 열시가 가까워서였습니다.
트루먼이 뭐라고 제시를 했는가 하면 맥아더에게 국방장관을 통해서

“한국 전장 현황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보고를 하라."

고 했습니다.

보통이면 참모의 보고를 받거나 누군가를 내려 보낼 텐데 모든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맥아더가

“내가 전장의 현장을 봐야겠다. 내가 전장에 직접 가서 맥을 짚어 봐야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흑석동 언덕까지 직접 나타난 것입니다.

와서 판단하기를, 합참의 전문내용을 보면, 해·공군 지원만으로는 한국을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한강이북에 있던 병력이 숫자상으로 8만 명이 있어야 하는데

4만 명 정도가 초전 3일 만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실은 4만 명 남은 것도 건제 부대 편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편성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는 사단이 두 개 밖에 없었습니다.

1사단과 6사단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연대가 어디 갔는지, 대대가 어디 갔는지 모르는
오합지졸이 되어서 도망쳐서 내려가는 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군을 가지고는 어디 방어선을 칠 수 있는 부대도,
능력도 없는 상황을 맥아더는 바로 본 것입니다.
보고를 하면서 지상군 투입이 아니고는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상군 투입을 트루먼이 결정한 것이 6월 30일입니다.

이 것이 한국을 구한 것입니다.
만약 미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았더라면
그해 7월 중순이나 늦어도 7월 말에는 전부 다 점령이 되었고,

아마 여러분이나 저나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하고 벌써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놀라운 것은 미국의 9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이 일본에 있었습니다.

24사단, 25사단, 1기병사단, 7사단이었습니다.

*****************

점령군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미국 군대 일등병 봉급이면 일본의 예쁜 젊은 여자를 하우스 걸로 데리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패전 후 거지 아닙니까?
신발도 닦아주고 세탁도 해주고, 안마도 해주고...

이등병도 그렇게 생활할 수 있었으니까
소위쯤 되면 구라파 최고의 귀족 생활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사들을 갑자기 소집을 하니까 전쟁에 대해서 생각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1개 대대를 만들어서 보낸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산이었는데,

이 오산에 보낸 것을 비롯해서 7월 5일부터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기 까지

미국 군대 1개 사단이 완전히 망가진 것입니다.

24사단은 만5천 965명 참여한 병력 가운데 8천 6백 60명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단장은 포로가 되고 연대장 세 사람이 희생되고 대대장 여섯 사람이 희생되고

연대 작전 주임 두 사람이 포로가 되는 희생을 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명과 그 사람들의 희생 위에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15 일 간의 북한군 공격을 지연시킨 것이었습니다.
그 지연을 위해서 미국은 1개 사단을 과감하게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안 되니까 나머지 일본에 있던 3개 사단을 모두 한국으로 불러 오는데,

금방 올 수 있습니까?

항공기, 배로 운반하는데 한꺼번에 못 오니까,
1개 대대가 들어오고 1개 연대가 들어오는 등

사단 편성이 안 된채 들어오는 대로 여기에 넣고 저기에 넣고 땜질식으로 막았는데

이 임무를 워커가 했습니다.

워커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굉장히 유능하고 훌륭한 장군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이나 장교가 그러한 임무를 맡아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자기의 생명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언제든지 죽을 용기를 가지고 그야말로 직업 전문 군인으로서의 할 일을 다 했던 것입니다.

소위 유명한 기동방어라는 것입니다.

기동방어란 가용 병력이 일본에 주둔해 있던 4개 사단과 오키나와에 있던 1개 연대, 29연대,

하와이에 있던 5연대가 전부 다입니다.
그 외 급한대로 본토의 미 2사단을 끌어오도록 조치한 것 등 이것이 가용한 전체 병력이었습니다.

한국군은 도망갔던 것을 가까스로 모아서 5개 사단을 만들었습니다.

워커는 자기 전용 비행기를 타고 보니 자꾸 뚫리는 이유가 일정한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낱개로 하니까

사이사이로 전쟁에 닳고 닳은 중공군들이 계속 침투하여 공격하며 몰려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방어를 할 수 있나 하고 비행기를 가지고 상공에서 관측한 다음

강을 이용해서 배치를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낙동강 방어선이 생겼는데

이것은 원래 계획에 있던 것도 아니고 워커가 지형을 보고 그곳을 채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으로 사단을 넣으면서 보니까

6사단이 목포 쪽에서 진주 쪽으로 가까이 오니 그쪽이 비어 있었습니다.

결단력 있고 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경탄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25사단을 하루에 160키로를 이동시켜 창령부터 남해안 까지를 25사단이 방어하도록 투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최초로 사단장 이름을 따서 ‘킨 타스크 포스'라고 해서 반격작전을 취하는데

여기서 미국은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면 북한군, 중공군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게릴라전을 했습니다.

전선을 형성해서 싸우는 데에는 별로 능력이 없어도 후방으로 침투하는 것에는 능한 사람들입니다.
6사단 병력이 함안까지 몇 천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 앞으로 고성, 진주 쪽으로 병력을 투입했는데

뒤에서 소동을 벌이니까 혼전이 되어서 할 수 없이 그 병력을 다시 뽑아서 원 출발선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킨 특수임무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부산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서 난전을 피우는 바람에 시간을 벌었습니다.

워커가 생각해 보니까 1개 사단이 10키로 정도 정면을 맡아야 정상인데

그 열배가 되는 10만 야드를 감당해야 할 정도로 병력이 없으니까

중요한 포인트에 경계 초소만 내놓고 아주 강력한 예비대,

예비대란 마이켈리스의 25사단 27연대, 2사단 23연대, 해병 여단

이 세 개부대를 증강시켜서 특수 부대로 북한군이 공격하는 곳마다

막아주는 식으로 방어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했습니다.

이런 방식의 방어임무수행을 기동방어라고 합니다.

이것은 워커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하나의 병력운용의 걸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백 회의 여러 가지 전투가 많지만 제일 큰 전투가

낙동강과 남강이 갈라지는 곳을 보면 볼록하게 나온 돌출부가 있습니다.
8키로의 폭에 종심은 6키로 정도 되는 곳이 있습니다.
볼록하게 나와 있으니까 북한군은 상륙해서 들어오기가 쉽습니다.
그곳이 굉장한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면 창원으로도 가고 영산으로도 가고 밀양으로도 가는 루트기 때문에 그곳에서 대 격전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이 다부동 전투를 들 수 있고,

또 하나는 포항을 거쳐 바로 부산으로 가서 끊으면 되니까 포항 전투,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때만 해도 미국이 벌써 전자 계통은 발전이 되어 있어서

북한군 암호를 전부 해독해서 어디를 공격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소방 부대(예비대)들을 대기시켰다가 들어오면 덮쳐내고 해서 북한군 쪽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가는 곳마다 당하니까 안 되겠다 생각해서 전 전선에 걸쳐

한꺼번에 공격하면 기동대가 어디로 가겠나 생각해서 일제히 공격을 한꺼번에 해서 굉장한 어려움에 처해

만든 것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고 철군을 해야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해서 만든 것이

 '데이비드슨 라인'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산의 약간 북쪽에서 양산, 밀양, 마산 북쪽 까지 방어선을 새로 하나 만들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이 안 되면 데이비드슨 라인으로 가고 그 다음엔

일본으로 철수 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는 8월이 아닌 9월 초순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한다고 해병을 뽑아가고

기동 예비대로 쓸 병력은 줄어드는데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덥치니까 데이비드슨으로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을 할 때에 워커가 비행기에 군성판을 크게 달고 동해부터 시작해서 전 전선을

약 100에서 150야드 높이로 비행했습니다.

워커가 타고 있는 비행기라는 것을 알고 밑에서 환호성을 하니까

워커가 이 정도의 사기면 데이비드슨으로 가지 않겠다고 해서

그 고비를 넘겨 인천 상륙작전과의 연결작전에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워커에 대해서는 그의 진정한 공로를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볼 때는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제일 공로가 큰 분이 워커 장군입니다.

워커 장군은 그 아들(샘 워커)도 대장 출신이고 한국에서 병력을 뽑아낸다고 할 때,

카터 대통령 때 항의하고 참모총장 물망에 올랐으면서도 물러난 사람입니다.

부자가 모두 미국 육군 대장인 경우는 워커 부자가 최초라고 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모택동과 미국은 전쟁하는 사령부 운영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모택동이 사용했던 참모는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참모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택동은 자기의 모든 공식 건물은 모두 버리고 조그마한 안가에 가서 비스듬한 침대에 45°로 누워서

부인도 가까이하지 않고 혼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나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한국 지도를 펴놓고 구상을 한 것입니다.

두 참모는 30대 전후의 아주 우수한 장교였다고 하는데,

두 장교에게 정보와 과제를 주고 시한을 줘서 보고를 받고 자기의 구상과 비교를 해서 판단한 다음

판단이 서면 바로 팽덕회에게 지시를 해서 그대로 실천하게 하는 전쟁지휘 스타일이었습니다.

미국은 트루먼이 있고, NSC가 있고,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군 장관, 해군 장관이 있고,

그 밑에 육군·해군 참모총장이 있고, 그 밑에 전구(戰區) 사령관이 있습니다.

얼마나 중첩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미국이 여러 가지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방장관은 마샬인데 마샬은 맥아더를 보고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과거 자기가 중령일 때,
이 사람은 총장을 지냈던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같은 원수였습니다. 원수는 종신 현역입니다.

장관 아래 합참의장인 브레들리를 맥아더는 아이 취급을 한 것입니다.
말 상대로 치지도 않으니까 이 사람들이 어려워서 말을 못합니다.
위계질서가 회사로 치면 과장한테 부사장이나 사장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더군다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다음엔 아무도 맥아더에게는 말을 못 붙였습니다.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성공의 정점에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준 사람은 김일성입니다.

정보보고를 받고 모택동이 두 참모들에게

"지금 보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 일본 부두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상륙에 관계되는

어떠한 함정이나 장비같은 것이 많이 온다는데 상륙작전을 한다면 어디로 할 것 같나? 며칠까지 보고해."

라고 지시하자 두 참모가 보고한 것이 가장 첫 번째가 인천이었습니다.
두 번째가 군산,

세 번째가 진남포 등으로 다섯 곳을 얘기했습니다.

모택동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았다고 하고는 김일성에게 특사를 보내서 인천 상륙작전이 있을 테니 그것에

대비하라고 했는데 김일성이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1949년에 중국이 공산화 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6월에 1년도 되지 않아 전쟁을 하는 것이니까

김일성 생각에는 스탈린이 대단한 것이지 모택동은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묵살해버렸습니다.


모택동이 다시 보냅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너희가 승산이 없다. 그곳에 너희의 주력이 들어 있으니 빨리 태백산맥을 통해 주력을 뽑아라."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김일성은

"미국이 상륙작전을 할 능력도 없고 안 해." 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가지고 있던 기동 예비사단을 낙동강으로 보냅니다.

인천으로 보내지 않고...

그래서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맥아더에게 모두들
“신이 내리는 특별한 영감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해서 모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아더가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맥아더를 싫어한다거나 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맥아더가 자신의 참모장인 알몬드를 상륙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맥아더는

 "상륙이 며칠 걸리겠나. 상륙만 하면 전쟁은 끝난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알몬드가 참모장과 겸직을 못하겠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말라하고 상륙작전 하고 며칠 후면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상륙부대 지휘관인 동시에 극동사령부 참모장을 겸직을 시켜 놓으니까

워커를 지원해야 할 참모장이 워커는 지원하지 않고

자기 상륙하는데 필요한 장비는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

포탄 등 모든 것을 자기 우선으로 만들어 놓고 워커가 달라는 것은 안주니까 워커가 엄청 고생을 한 것입니다.

워커는 마샬의 인맥입니다.
맥아더는 구라파 쪽에서 전투했던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구라파 쪽에 우선을 두고 모든 조치를 했기 때문에 태평양은 소외를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구라파 쪽 인맥에 대해서는 굉장히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맥아더가 워커와 자유롭게 대화와 논의를 하고 군사령관 대우를 제대로 해주었다면

전쟁 국면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워커는 군산 상륙작전을 구상하고 군산에서 대전으로 상륙부대가 가고

낙동강 부대들이 대전에서 연결이 되면 북한군 주력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북한 중공군을 그때 완전히 섬멸했다면

오늘의 북한군은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북한군은 껍데기가 되는 것입니다.

워커는 모든 군사학교에서 좋은 성적이 아니었고 키가 크고 늘씬한 외모가 아니고

자그마한 키에 싸움닭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기 때문에

외모 등에서 맥아더에게 호감을 사지 못했습니다.

맥아더가 쉽게 말하면 워커를 제대로 예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말 상대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현장의 감각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동경에 있는 제일 호텔 6층에 자리 잡고

전쟁의 감각이 없어진 데에 사실은 큰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진한다고 경쟁적으로 100미터 경주하듯이 올라간 것입니다.

혹시 중공군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우발계획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가는데

누구하나 맥아더에게 건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각하, 혹시 중공군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예비 계획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참모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맥아더 주변의 참모들이 누군가 하면 사실 미국의 전체 스탠다드로 볼 때 좀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건의 해보다가 전혀 먹혀들지 않으니까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젠하워가 맥아더 밑에서 6년간 근무했습니다.
3년은 부관으로 있었고, 3년간은 예하대에서 근무하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갈라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 이유는 모릅니다.

이렇게 우수한 사람들이 떠나가 버리고

"예, 우리각하, 우리각하."

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으니까 조금 모자라는 집단이었습니다.

정보 참모인 윌러위라고 하는 장군은

중공군 규모가 20만, 30만 명이 올라와도 적당히 줄여서 3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합니다.

완전히 오도된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맥아더 는 그해 추수 감사절이 11월 23일 이었는데

"추수 감사절 전에 전쟁이 끝나고 크리스마스 만찬은 포트 베닝에서 한다."

고 얘기가 떠도니까 맥아더가 그렇게 말하니까 틀림없다고

모두 마음을 놓고 압록강으로 먼저 가는 경주를 했습니다.

모택동의 생각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산악이 많고, 골짜기가 많고 도로는 협소해 도로 발달이 안 되어 있고 철도도 마찬가지다.

미국 군대는 많은 장비를 가지고 있다. 장비는 도로만 따라 움직인다.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끌어들인 다음 도로만 막아버리면 장비는 못쓰는 것이다.

우왕좌왕 할 때 좌우 산에서 중국에서 게릴라 하듯 내리치면 다 잡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중국 사람들 지휘방식이 수 틀리면 죽인다는 말로 병사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저녁 어두워서부터 새벽 4시까지만 기동한다,

4시 이후 얼쩡거려서 항공기에 발견이 되는 자는 사살하라는 것입니다.

계급 여하를 불문하고 주간에 항공기에 발견되는 행동을 하는 자들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움직이겠습니까?

 죽인다는데...

중국 사단은 1개 사단이 야간에 산악 행군을 어느 정도 하는가 하면 박격포 등을 짊어지고 24키로를 합니다.
그 인내심이라고 하는 것은 지구상에서 극히 드문, 소련 사병들이나 맞먹을 정도의 인내심입니다.

야간에 산으로 24키로를 행군해서 들어와 있는데 우리는 북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고기 잡을 때 보면 물 흐르는 방향 쪽에 그물을 벌려놓고 고기를 잡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제1차 중공군 개입이 그해 10월 19일에 침투하기 시작하고 24, 25일에 공격을 받았습니다.

운산에서 백선엽 장군께서 중공군 포로를 잡습니다.

그때 모택동의 지침은 간단합니다.

전선에서 한국군이 배치된 곳을 가장 빨리 파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군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군은 미국의 같은 사단보다도 화력이 1/3도 되지 않는다,

장비도 빈약하다,

편성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결집력이 약하다,

한국군을 터트린 다음 그 구멍으로 주력을 넣어서 미국군들 뒤를 때려라,

뒤를 막고 산에서부터 미국군 협곡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식으로 37도 선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평택, 삼척선까지 그 방식으로 밀고 내려온 것입니다.
미국은 속절없이 계속 당한 것입니다.

거기다 맥아더는 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어떻게 보고를 했는가 하면

“전혀 새로운 전쟁이다. 현재 이 병력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 병력을 증원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하게 해 달라."

라고 맥아더가 얘기하니까 미국에서 놀랐습니다.

두 번씩이나 합참이 내린 훈령은

“한국에서 철수해도 좋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도 좋다."

고 한 것입니다.

맥아더는 병력 증원이나 핵무기 사용 등 중공군 공격하는 방법은 안 주고 패배를 인정하고 병력을 빼내라고 하니까

맥아더로서는 약이 올랐습니다.
계속 말싸움이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맥아더가 4월 12일 해임되고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오게 됩니다.

리지웨이가 와서 생각한 것은 군대가 올라가다가

부대와 부대사이의 간격으로 들어와서 당했으니까

부대와 부대의 어깨를 붙여서 전진을 천천히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턴더볼트, 킬러 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차근차근 반격해 올라갔습니다.

중국의 문제는 처음 1차, 2차 공격해 내려올 때는 악을 쓰고 내려왔지만

일개 사단의 하루 먹고, 물 마시고 하는 보급량이 40톤이 필요하고

미국군은 하루에 350톤이 필요합니다. 약 9배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중국 사람들은 도로로 나르지 못하니까,

나무 막대기에 걸어서 둘이 들고 가는 식으로 산길을 운반 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더욱이 밤에만 이동을 했습니다.

38선 이남으로까지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공군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37도선에서 38도선이 있는 곳으로 후퇴를 시작하고 후퇴를 시작 할 때

리지웨이가, 중공군한테 당해서 37도선까지 내려왔는데,

무엇인가 우리가 중공군을 깰 수 있음을 보여주어 사기를 올려야겠다고 해서 시도한 것이

지평리 전투입니다.


지평리 전투는 굉장히 중요한 전투입니다.

이것은 고의적으로 테스트, 실험한 전투입니다.
제일 잘 싸우는 연대장이 2사단 23연대장과 5사단 27연대장입니다.
둘 중에 누구를 쓰느냐 해서 2사단 23연대장을 선택했습니다.

2사단 23연대장에게

원주 서북 34키로에 있는 지평리에 프랑스 군 1개 대대와 탱크 1개 중대, 105M 1개 대대, 155M 1개 포대 등

포함해서 5400 명을 지원했습니다.

그곳 지형이 둘레가 19키로, 종심이 1.9키로인 접시처럼 중간이 파이고 동그랗게 산으로 되어 있어서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포위를 받아서 나흘간 전투를 하는데

공중 보급으로 탄약과 식량을 대주고 계속 싸워서

그 주변 시체만 5천구, 맥기이라고 하는 소대장은 소대 정면에서 800구의 중공군 시체를 건져 올린 것입니다.

이 지평리 전투를 통해서 모택동과 팽덕회가 놀란 것입니다.

"현대화 된 기계, 헬리콥터 등으로 전투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가 질려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해서 지금의 휴전선 비슷한 곳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리지웨이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가고 그 후임으로 밴 플리트가 8군사령관으로 왔습니다.

밴 플리트는 명장입니다.

밴 플리트가 전투를 한번 해본 뒤 중공군의 약점을 알고 39도선까지 올릴 자신이 있어서 밀어 올리는데

리지웨이도 말리고 미 합참에서도 못 가게하고 전부 제동을 걸어서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조금만 밀어줬으면 금강산은 지금 우리 땅이 되어 있고,
원산선까지 충분히 올라 갈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보급이 안돼서 엉망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개 중대가 200명이 압록강을 넘으면 전선에 도착하는 것은 10에서 15명밖에 안 되는 실정이었습니다.

밴 플리트가 나중에 전역 후 '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때 그 기회를 왜 승인을 안 해 주었는지,

승인만 해 주었으면 고저작전이라고 해서 금강산 북쪽 원산 바로 남쪽 까지는 진출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고 한탄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할 것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나라 3군단이 완패를 한 것입니다.

맥아더의 참모나 주변의 장군들은 좀 모자란 장군들이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수한 사람 밑에는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만 남고

판단력이 있어서 건의 하는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2사단 같은 경우, 

 2사단 9연대는 970명 가운데 150명만 생존하게 되고

태형의 도로 10Km를 지날 때는 부상당한 사람들이 길에 누워 있는데

탱크나 트럭이 자기들 부상당한 병사 위를 그대로 밀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서 버리면 양쪽 산에서 쏘아서 자기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2사단은 3, 758명을 잃었습니다.

이런 과정도 거쳤습니다.

특히 흥남에서의 철수 문제는 영화로도 곧 나온다고 하는데

핵심은 북진하라고 하니까 맥아더의 참모장인 알몬드는 북진을 계속 강행하다가

후방으로의 길이 막히며 사단이 몰살당하는 것입니다.

해병 스미스 사단장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사람인가 하면,

북진을 하면서 보니까 북진을 막으려고 했다면 끊었어야 할 교량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해병 1연대 3개 대대를 중간 중간에 남겨 놓으면서 퇴로를 지키도록 조치를 하고

영하 20, 30도 되는데 간이 활주로 공사를 했습니다.

120키로가 되는 거리를 후퇴하는 과정에서 중간 중간에 부대를 두고,

그 다음 공군이 중장비를 버리면 항공기로 실어 나르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해병답게 철수한다고 해서 수천 명의 환자와 장비 모두를 가지고 철수를 했습니다.

스미스 장군 같은 사단장이 아니었으면 미 해병 사단은 전멸할 상황이었습니다.

맥아더의 지시대로 북진을 외칠 때,
판단도 없이 북진을 외쳤던 부대의 상당부분,

미 2사단 카이저의 경우와 9군단장 콜타 같은 경우 맥아더의 눈치를 보고

맥아더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만 생각하지 현장에서 병사의 생명 등은 둘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몬드 같은 경우도 우리가 하나 기억할 만한 것은 흥남에 몰려온 10만 명의 피난민을 실어 날랐다는

것입니다.


작전 참모 포니 대령 같은 사람은 어떤 아이디어를 냈는가 하면

탱크 등을 배 위에 실으면 중간에 생기는 공간에 피난민을 실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말이 그렇지 십만 명을 싣고 거제까지 나온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여기 이북 5도 지사님이 계시지만, 배만 있었다면 북한 주민이 거의 다 나올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부상을 당해 트럭 위에 있는데 밤에 중공군이 와서 찔러 보고

확인 사살을 하고 신발을 벗겨 가는 와중에도 피난 나온 북한 사람들이 중공군이 보는 앞에서 자기들을 보고

목례를 하고 얼음을 녹여서 물을 주고 절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굉장한 감사를 느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배 위에서만 아이를 다섯을 낳았습니다.
김치 one, 김치 two라고 해서 현재 김치 five가 거제도에서 수의사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방금 말한 알몬드가 철수한 다음에 정상적인 지휘 체계로 들어와서 워커의 지휘 체계로 되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알몬드는 휴전선 쪽에 와서 전투에 참가했어도 한국군과 전체 전쟁에 상당한 폐를 끼쳤습니다.

원주 전투에서는

8사단과 6사단을 앞세우고 미국 군대를 뒤에 둬서

8사단 같은 경우 사단에서 장교 323명, 사병 7, 141명의 손실을 내었으며

3사단, 5사단은 각 사단에서 3천명씩 손실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종 관념이 심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우리나라 3군단이 현리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것도 발단은 알몬드 때문이었습니다.

알몬드는 10군단이고 바로 우측이 한국군 3군단인데 한국군 3군단의 3사단과 9사단의 병참선이

알몬드의 9군단을 거쳐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왜 남의 섹터 경계를 침범하느냐고 하며 알몬드가 경계대대를 쫓아냈습니다.

쫓아낸 곳이 오마찌라고 인제와 화진부를 통하는 병참선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중공군은 그것을 알았는지 어쨌는지 오마찌를 점령해서

 3군단 후방과 전방이 모두 중공군을 맞게 돼서 3군단이 그대로 와해되고 풍비박산이 되어버렸습니다.

밴 플리트가 지금의 용평 쪽에 작전회의를 소집해서 3군단을 해체해 버리고

육군본부의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를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작전 통제권을 UN군에 넘겨줬지만 미국 사람들이 점잖아서 한국군에 대해서는

한국군 육군 본부를 통해서 작전 통제를 했던 것을 그때 종료시키고

한국군 육군 본부는 인사, 군수, 교육만 한다고 해서 소외된 것이 그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뚫린 곳을 막는데 누구를 이용하는가 하면

수도사단 1연대장 한신 대령이 1연대를 끌고 대관령을 점령해서

1, 180명의 중공군을 하루 저녁에 잡고 1연대 전사자는 12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군이 낸 제일 큰 전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전협정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북한군은 그 당시 우리나라 군대와 UN군의 관계보다도 월등히 못했습니다.
팽덕회가 사령관이고 그 아래 김일성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군대라는 것이 엉성하게 구성한 3개 군단밖에 되지 않고 병력 수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지평리 전투를 겪은 다음 중공군의 판단은 지상전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해

지하로 들어가야겠다고 해서 1951년 8월부터 휴전 회담을 하는 동안에 지하공사를 했습니다.

엄청난 지하 공사가 휴전선 북방에 되어 있습니다.

임진강에서 거진까지 약 4천키로의 교통호를 파놨습니다.
지금 3사단 전방에 있는 오성산 밑에는 6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지하 시설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산에 상륙하려던 밴 플리트가 방법이 없으니까 정면으로라도 밀어 올리려고 실험을 했습니다.

마치 리지웨이가 실험하듯이 실험을 하려고 철원 근방 한 전초진지에 굉장한 항공력과 포병사격을 하였는데

중공군 손실 65명에 미국의 공격했던 부대는 오히려 더 많은 77명을 잃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정면으로는 휴전선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중공이 휴전선 공사의 90% 이상을 한 것입니다.
북한은 동해에 약간 한 것뿐이고 중공군이 지금 휴전선의 모든 지하시설 등을 다 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어떠한 느낌을 받는가 하면

중공은 지금의 휴전선을 자기들의 국경선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공을 생각할 때, 딱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이라는 얘기입니다.

자기들이 이빨이라면 북한은 입술이라는 것입니다.
입술과 이빨의 관계가 중국과 북한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알몬드 같은 참모장은 중국 군대를 군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론드리 맨(Laundryman)'
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부 활극을 보면 중국 사람들이 세탁소나 해서

중국인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들이 무슨 군대를 만드느냐고 얕보고 있다가 당한 것입니다.

휴전회담은 전장에서 얻지 못한 것을 휴전회담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입니다.

국지전을 하면 손실이 나서 미국 여론이 휴전을 원하게 될 것이라고 해서

피의능선, 저격능선에서 수천 수만명씩 피해가 나니까 미국 여론이 백해무익한 전쟁이라고 해서

빨리 전쟁을 끝내라는 여론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여론의 힘을 입어 여러 가지를 양보하게 된 것입니다.

개성 같은 곳은 사실 북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UN군과 북한군이 대치하고 있던 중간 지점이었는데,

북한이 그곳을 휴전회담 장소로 정하자고 하면서 슬그머니 준비한다고 들어와서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개성을 찾아야 된다고 하니까

리지웨이가 개성을 내놓으면 지금 서해 5개 도서를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개성의 중요성을 알고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리지웨이가 합참을 보고

“좋다, 그러면 내가 공격을 해서 뺏겠다."

고 했지만 승인을 하지 않아 못하게 됐습니다.

서해 5개 도서 문제는

국제법상 영해가 12해리(약22키로)인 점을 적용하면 남쪽과 북쪽이 서로 겹치는 곳이어서 분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1999년에 김정일이 자의로 선을 긋고 계속 말썽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휴전회담에 참석했던 미국 대표들이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한 것이

미국 사람들의 논리로는 얘기가 안 통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휴전선을 어떻게 정하는가 하는데 대해 공산측은 계속해서 38선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안된다고 하니까

그해 8월에 한 회담에서는 2시간 11분 동안 서로 노려만 보던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회의를 겪고 겪어서 만들어 놓은 것이 휴전협정입니다.

휴전협정이라는 것은 정치 협상을 통해서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예비 회담적 성격입니다.

그래서 90일, 즉 3개월간을 예측하고 만든 협정입니다.

그런데 그 3개월이 57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고

얼마 전 천안함 사건, 또는 1차, 2차 연평해전 같은 것이 전부 휴전 협정을 위반하는 사태로 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당면한 전쟁에 관한 제일 기본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는 북한의 핵도 아니고, 미사일도 아니고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국민들의 80~90%가 한국 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해

누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려서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 빨리 정확하게 알고 우리의 헌법을 지키고 헌법 정신에 의해서

우리가 엄정하게 국가의 정통성과 우리 체제의 우월성, 오늘날 우리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경쟁, 자유기업,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법치를 제대로 할 때,

그래서 국내에 트로이 목마와 같은 북쪽에 동조하는 세력이 공공연하게 날 뛰는 것을 정리할 때

우리 국방은 문제가 없습니다.

더욱이 한·미 동맹을 가지고 있는 한,

문제될 것이 없으며 한·미 동맹을 가진 것에 대해서 우리가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서독이나 일본이나 어느 나라도 NATO다 뭐다 해서 동맹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지,

미국도 동맹 없이는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세대가 때는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올바르게 우리나라가 어떻게 구해지고 발전해 왔는지를

우리 자손들과 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우리나라 안보에 있어서 그 이상 강조할 수 없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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