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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념
나는 눈을 감고 있다. 깜깜하다. 이번엔 눈을 떠본다. 그래도 깜깜하다. 얼굴에 뒤집어 쓴 검은 두건때문이다.
형집행장엔 불을 켜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깜깜하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적막함속에서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그래 그냥 기다리면 되는거야.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죽일 이유가 없었다.
검사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을 했다.
그 결과 나는 살인자가 된 것이다.
 
장도리에서 내 지문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사인은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이었고 머리의 상흔은 장도리와 크기와 모양에서 일치했다.
장도리로 같이 호두를 깨서 먹었다는 나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그들은 나를 살인자로 몰기 위하여 모든 정황과 증거를 귀신같이 짜맞추었다.
애절한 나의 항변은 불필요한 논리에 불과했다.
 
결국 나는 그 들이 짜맞춘 스토리에 굴복하였다.
나중에는 마치 내가 실제로 그렇게 했던 것 처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이렇게 삶을 마치도록 정해져 있었나 보다 라는 생각을 따라 눈앞의 정황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처음 만났던 날 부터 우리 둘은 너무 잘 맞았다.
같이 있을 때 우리 둘 사이에 대화는 많지 않았다.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느꼈다.
이 사람이 나의 진정한 반쪽임을 그리고 감격하였다.
 
집행관이 마주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진정한 다른 반쪽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전해달라 " 하였다.
그리고 무언가 모자라는 것 같아 "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다시 만난다." 라고 소리쳤다.
어쩌면 잠시 후 그녀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틀림없이 만난다.
시간의 저편에 그녀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그 날 밤 그녀는 욕실에 물을 받아 놓고, 쑥스러워 하는 나에게 계속 같이 목욕하자고 졸라댔다.
우리는 욕조의 양 끝에 등을 기대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발이 욕조 바닥 가운데 쯤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발과 맞다았다.
우리는 발가락으로 서로의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장난을 쳤다.
얼마 안되서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욕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내가 무어야 ? 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돌아왔고, 양손엔 냉장고에서 막꺼낸 차가운 카스캔 두개를 들고 있었다. 
 
"자기야, 뜨거운 물 속에서 마시는 맥주 맛을 알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와 내 무릎위에 앉더니, 캔 하나를 따서 내 입술에 대 주었다.
나는 손을 대지 않고 그녀가 내민 캔 속의 맥주를 들여 마셔 입안에 가득채우고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러게 잡아 당겨 키스하였다.
그녀의 입과 나의 입은 하나가 되었고 하나된 입속에서 차가운 맥주의 입자가 축제날 폭죽처럼 쉬지않고 터졌다.
그리고 우리는 욕조안에서 서로를 안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 그녀는그 날밤이 이세상에서 그녀의 마지막 밤이었슴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항상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어서 나와 사랑을 나누는 시간에도 늘 소극적이었다.
그런점은 내가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작은 불만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날 밤 그녀는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시간의 끝에 우리 둘이 놓여 있슴을 알고 있어서 인지, 있는 힘을 다하여
나를 탐닉하려 하였다. 우리 둘은 충분히 만족했고 마침내 지쳐서 떨어졌다.
 
나는 정신을 다 차리지도 못한 채 그녀의 집을 빠져 나왔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그녀는 내가 나간 후에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살인자가 침입을 했던 시간은 내가 나간 직후였다.
참혹히 살해된 그녀의 질 속에서 내 것으로 판명된 정액이 검출되었고
사체의 경직도로 추정한 살해 시간과, 정액의 체외 배출 후 시간이 일치하였다.
장도리에서 살인자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아마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검사의 소장 내용은 유치하였다.
피의자 조서에는 그 날 밤 우리 둘이 사랑을 나눈 후 비밀스런  관계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그녀가 헤어지자 요구했고, 격분한 내가 그녀를 살해 한 것으로 쓰여 있었다.
 
삶의 미련은 남아 있지 않다.
그녀가 없는 시간을 살아내는 편이 오히려 훨씬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지금 아주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두려운 시간의 순간이 오히려 기다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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