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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성계의 조선건국의 의미


 

이성계의 조선건국의 의미

 

몽골이 계속해서 고려를 공격하며 내건 강화조건은

최고 통치자가 강화도로부터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고,

몽골의 칸에게 와서 항복하라는 거였다(出陸入朝).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으니 국왕이 가야 했지만

당시 고종은 늙고 병들었다.

 

태자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1259 4월 마흔한 살 태자는

전쟁의 시름에 찌든 아버지 고종에게 인사를 드리고

문무백관이 갹출한 은과 베를 여비 삼아

북행길에 나서게 된다.



이미지 

 

태자는 몽골의 몽케 칸(헌종)을 만나러

수만 리 북행길을 가야 했는데

강행군 와중에 아버지의 부음을 듣게 된다.

태자는 3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를 표한 뒤

다시 짐 끈을 동여맨다.

 

그런데 또 황망한 소식이 들려온다.

남송을 공략하던 몽케 칸이 갑자기 급사하고 말았다.

항복의 대상이 갑자기 없어진 셈이었다.

여기서 고려 태자는 몽케 칸과 대립하던 쿠빌라이를 택하기로 한다.

 

쿠빌라이(1215~1294)로서도

고려 고종이 죽었다면 자기 눈앞의 태자는

곧 고려 왕이었고 그의 항복은 곧 고려의 항복이었으니

 한 나라를 그냥 얻는 것과 진배없었다.


이미지

몽골 쿠빌라이 칸의 초상화.
쿠빌라이는 고려를 얻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겼다.

 

쿠빌라이와 대면했던 고려 태자,

역사에 원종(元宗)으로 남은 고려 왕은

그렇게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고려는 몽골에

항복해 쿠빌라이가 세운 원()에 편입됐다.

 

쿠빌라이는 만주 일대를 영지(領地)로 받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 가문 세력을 견제하고자

스스로 항복을 선택한 남쪽의 고려를 이용했다.

 

원나라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瀋陽王)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다.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한 데는

남만주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고려인 통제에 편리했을 뿐 아니라

만주의 지배자인 테무게 가문과 고려왕을

동시에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고려왕과 심양왕은 수시로 대립했다.

 

원나라 시대 만주 일대를 지배한 테무게 왕가는

나얀 시기 원나라 대칸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에 실패한 후에도 제후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실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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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무신란주역 중 하나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인 이안사는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기 4년 전인

1255년 테무게 왕가로부터 천호장(千戶長)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아 두만강 하류 일대를 지배했다.

 

이안사를 고조부로 하는 이성계 일가는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해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이안사로부터 시작되는 이성계찬가가

바로 용비어천가다.

 

페스트의 대유행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1368년 대도(북경)를 점령한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1388 3월 남옥에게

10만 대군을 줘 북원(北元)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남옥은 북원군을 내몽골 부이르호(捕魚兒海) 전투에서 대파하고,

북원을 외몽골로 축출했다.

 

이로써 북원(北元)과 고려 간 연계는 끊어졌으며

왕실을 포함한 고려 기득권 세력은

비빌 언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에 앞선 1388 3월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평안도 북부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나라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해 고려는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으로 대표되는 대명(對明) 강경파와

이성계, 조민수, 정몽주 등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분열됐다.

 

이성계 일파는 1388년 음력 5월 우왕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치러 출격했다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회군해

대명(對明) 강경파를 숙청하고,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를 구축했다.

 

천호장 겸 다루가치 울루스부카(이자춘)를 승계한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투를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성계는 빛나는 군사 실적을 기반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우뚝 섰다.

 

이성계는 몽골식 평지전과 산악전에 모두 능숙했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군단은 다른 고려 군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최영, 최무선 등과 함께

일본 가마쿠라 막부 말기

남·북조(南北朝) 내전에 패배한

규슈의 사무라이 위주로 구성된 왜구의 침략을

진포와 운봉(남원) 등지에서 격퇴하고,

신흥 사대부의 대표격인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



이미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즉 조선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승리와 조선 건국은

고려의 부패한 친원(親元) 기득권 세력을

밀어냈다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한족 문명을 절대시하는

나약하고 폐쇄된 나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1392년 조선 건국은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 간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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