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사원, 사원의 도시 - 앙코르와트
Angkor Wat in Cambodia
앙코르와트
19세기 중반 프랑스 학자 무오는 앙코르와트를 재발견한 뒤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남긴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다고 환호했다.
그 이후 앙코르와트를 본 많은 사람들 역시
거대하다, 경이롭다, 정교하다, 완벽하다, 신비하다라는 말을 입에서 땔 수가 없었다.
1860년 초 프랑스 박물학자 알베르 앙리 무오(Albert Henry Mouhot)는
진기한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현지 안내인 네 명과 함께 캄보디아의 밀림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안내인들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더 들어가면
몇 백 년 동안 텅 빈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주술에 걸린 수많은 유령들이 들끓고 있다고 했다.
무오는 텅 빈 도시가 있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곤 직접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안내인들을 설득해 밀림 속으로 계속 들어가던 무오는 갑자기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기에서 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의 청색, 정글의 초록색, 건축물의 장엄함과
우아한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그 어떤 유적보다도 위대하다.
세계에서 가장 외진 곳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인공호수와 끝없이 이어진 수로, 수많은 유적지들을 볼 때
이 일대에 매우 번창한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오가 발견한 곳은 400년 전에 멸망한 옛 도시 앙코르의 폐허로
현재 캄보디아의 북서부 시엠레아프의 톤레사프호수 북쪽 일대(일명 앙코르 지방)에 있는
돌과 벽돌로 지어진 앙코르와트 유적군이다.
앙코르와트는 ‘도시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그 일대 수많은 앙코르 건축물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적지인데 때로는 일대 유적군 전체를 ‘앙코르와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발견할 당시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엠레아프는 캄보디아 3대 도시 중 하나로 한국의 경주 같은 고대 도읍지이다.
앙코르와트에는 폭이 넓은 도로가 동서로 질서정연하게 뻗어 있고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정교하게 건축한 사원 600여 개가 세워져 있다.
그중 10여 개는 크기가 이집트의 룩소르대신전이나 중세 유럽의 대성당과 비교할 만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 건물, 가장 큰 종교 건축물로 앙코르와트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계단형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미물계 · 인간계 · 천상계로 구분된다고 한다.
12~13세기에 앙코르왕국은 두 왕의 강력한 통치로 번성했다.
태양의 수호자로 일컬어진 수리아바르만 2세는 지금의 타이 영토 정도로까지 세력을 떨쳤고
‘도시의 사원’ 앙코르와트를 건설했다.

앙코르와트는 동서 1500미터, 남북 1300미터의 웅장한 사원으로,
약 2만 50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37년 동안 건설했다.
몇 겹의 성곽이 앙코르와트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지막 성곽 바깥은
다시 폭 190미터의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앙코르 유적 중에서는 드물게 서쪽에 정문 입구를 두었으며 큰 탑문이 있다.
탑문에서부터 사당까지는 너비 9.5미터, 길이 475미터인, 돌이 깔린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이 유적은 수리아바르만 2세가 힌두교 비슈누에게 바친 것으로, 그가 죽은 다음에는 묘로 쓰인 것 같다.

앙코르와트로 들어가기 위해선 사방을 둘러싼 해자 위의 다리를 지나야 한다.
사원을 제대로 보려면 3생(전생 · 현생 · 내생)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건물은 세 겹으로 된 회랑과, 이 세 겹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앙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겹의 회랑은 중앙 사당 쪽으로 들어갈수록 한 단씩 높아져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를 이룬다.
제1회랑은 동서 215미터, 남북 187미터이고 총 800여 미터인데
회랑벽면에는 크메르제국의 신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가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역사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캄보디아에서는 역사교과서와 같다.
박물관 유물을 훑어보듯 돌아보아도 족히 1시간은 걸리는 이 엄청난 ‘4단 병풍식’ 부조에는
힌두교의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라마야나(Ramayana)〉에 나오는
카우라바(Kaurava)족과 판다바(Pandava)족 간에 벌어진
쿠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수리아바르만 2세가 코끼리를 타고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는 장면도 있고
힌두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을 표현한 장면도 있다.
88명의 아수라와 92명의 신이 장생불로약을 추출하려고 ‘넓은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
버터를 만드는 신화 속의 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800여 미터에 이르는 부조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앙코르 왕조는 앙코르와트를 지은 수리아바르만 2세와
앙코르톰을 지은 자야바르만 7세 재위 무렵 최고 전성기였다.
신의 영역인 높이 65미터의 중앙탑은
70도가 넘는 가파른 성벽 그 자체로 담력이 없는 사람은 오르기를 포기할 정도다.
능숙한 등산가라 할지라도 두 손 두 발을 써서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를 신에 다다르기 위한 예의라고 한다. 
모서리에 네 개의 탑이 서 있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탑은 앙코르와트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궁궐처럼 화려한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앙코르와트는 신의 세계를 지상에 구현한 사당인데
중앙탑은 힌두교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받드는 수미산(須彌山)을 나타내고
참배 길은 세계의 기축(基軸) 도로를 모방하며 둘레를 에워싼 벽은 히말라야산맥을,
해자는 세계의 끝인 깊은 바다를 상징한다. 
사원 안의 곳곳에는 비슈누에 관한 신화가 조각되어 있고
국왕들의 모습을 비롯하여 코브라 · 무희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수리아바르만 2세의 후계자인 자야바르만 7세는
30년을 통치하면서 세력을 최대로 확장시켜 현재의 캄보디아 · 라오스 · 타이 ·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고 도읍인 앙코르톰을 재건하고 병원 · 숙박시설 · 도로를 건설했다.
그가 건설한 건물에 이런 글귀가 남아 있다.
“임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이다.”
‘큰 왕성’이란 의미의 앙코르톰 역시 신의 세계를 모방해 건설했는데
높이 8미터, 한 변이 3킬로미터인 정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폭 100미터의 해자가 주위를 두르고 있다. 규모만 보면 앙코르와트보다 더 크다.
앙코르 유적지 일대 항공사진: 앙코르톰이 앙코르와트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앙코르는 왕도(王都), 톰은 크다(大)는 뜻이다.
3킬로미터의 성벽과 그 바깥의 해자가 정사각형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중앙에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바이욘사원이 높이 솟아 있다.
해자를 지나는 다리 난간은 ‘유해교반(乳海攪拌, 우유바다 휘젖기)’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한쪽에는 54명의 신이, 다른 한쪽에는 54명의 악마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의 몸통을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유해교반이란 남녀교합을 우주창조의 모습으로 표현한 힌두교의 창조신화이다.
앙코르톰 중앙부에는 높이 54미터의 바이욘사원(납골당이 있는 불교 사원)이 있다.
바이욘사원에는 54기의 사면탑(四面塔)이 있는데 사면이 부처 얼굴인 사면불안(四面佛顔)
관세음보살을 탑의 당상부에 안치한,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사면불안은 사방팔방을 자비로써 비춘다고 하는데 자야바르만 7세는
스스로를 관세음보살과 동일시하면서 사면불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면불안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며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바이욘사원은 세계의 중심과, 왕의 지배가 전 세계에 미친다는 것을 상징한다.
바이욘사원을 지나면 벽에 새겨진 코끼리 조각에서 이름을 딴 코끼리 테라스가 있다.
코끼리 테라스는 병사들을 사열할 때 이용했던 긴 회랑으로,
중앙의 국왕 전용 테라스에는 반은 새(독수리)고 반은 사람인 가루다 조각상이 있다.
그 앞으로 동쪽 승리의 문을 향해 행군용 도로가 곧게 뻗어 있다.

나병왕(Leprous King)의 테라스는 7미터 높이의 기단에 부조가 뛰어난
다섯 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크메르 왕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일부 크메르 왕이 나병을 앓은 것으로 추정한다.
바이욘사원의 북쪽에 있는 바푸온사원은 힌두사원인데 앙코르톰보다 앞선 시기에 건설되었다.
원래는 바이욘사원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바푸온사원 북쪽에 접해 있는 왕궁 터에
피미아나카스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도 앙코르톰 이전에 건설된, 피라미드 형태의 힌두사원이다.
상당 부분이 붕괴되었지만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앙코르톰 동쪽에 거대한 나무뿌리로 유명한 타프롬(Ta Prohm)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건설하기 전에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불교사원이다.
이 사원의 방 한 곳에는 벽면과 천장을 각종 보석으로 장식해 크메르왕조의 영화를 한껏 뽐냈는데
현재는 모두 도굴되어 보석이 박혀 있던 구멍만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타프롬사원은 전성기 때 3000여 마을을 통치했고 8만 명이 사원을 관리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무대로도 유명하다.
크메르인들은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밀림에다 어떻게 앙코르와트 유적의 건축물들을 세웠을까?
앙코르와트 유적군에 사용된 건축 재료는 연와(벽돌) · 라테라이트 · 사암이다.
벽돌(12인치×6인치×4인치)은 서로 마주대고 비벼서 모서리를 매끈하게 한 후 조심스럽게 쌓고
라임 · 야자 · 설탕 · 덩굴식물의 수액으로 접합했다.
벽돌을 쌓은 후 벽 표면을 문지르거나 석회와 모래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조각한 후 치장했다. 대부분의 벽돌은 직경 2.5센티미터, 깊이 3센티미터의 구멍을 뚫고
철제로 보강했는데 이것은 벽돌이 지정된 위치에 견고하게 설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매우 두꺼운 벽인 경우 내부를 벽돌 조각과 흙으로 채웠다.
회반죽 사용은 9~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쇠퇴했다.
후기에는 주로 라테라이트와 사암을 사용하여 건설했다.
라테라이트는 크메르 지역의 특수한 재료로, 공기와 만나면 단단해지고 절단하기 쉬운
철분을 함유한 점토이다. 주로 건물의 토대나 평평한 단, 계단이나 담을 쌓을 때 사용한다.
대체로 두께 16인치, 폭 12~20인치, 길이 23~32인치로 제작했는데
때로는 보다 커다란 형태로도 만들었다. 사암은 바위를 가열하여 약 4톤의 덩어리로 잘라 사용했다.
사암으로 건축할 경우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매끈하게 표면을 갈아 밀착시켰다.
문틀 · 창문 · 문턱 · 조각의 하단부는 편암과 현무암을 사용했다.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건축은 아치를 사용하지 않고 돔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돔 형태를 내어쌓기법을 사용하여 해결했는데 돔은 올라갈수록 두께가 얇아진다.
결론적으로 앙코르와트의 유적군의 대형 건축물은 빈틈없는 설계와
유효적절한 재료 사용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탄생할 수 있었다. 
앙코르와트 유적군은 파괴의 흔적이 완연하다.
과거 도굴꾼들이 무차별적으로 유물들을 도굴해 엄청난 가격으로 팔았는데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도 자신이 도굴에 참여했다고 시인했을 정도이다.
앙코르와트 자체의 면적이 워낙 넓어 철저한 경비가 어렵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예술품이 도난되고 있다. 그래서 무려 7000여 점이 넘는 문화재를
박물관에 보관하면서 현장은 복제품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잦은 내전으로 인해 문화재를 제대로 보관할 여력도 없는 상태이다.
현재 앙코르와트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유적 목록에도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 ・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생각의나무, 2006
- ・ 〈수십kg 돌들, 어떻게 천 꿰듯 쌓았을까〉, 《조선일보》, 2003. 11. 7
- ・ 〈꼭두새벽에 앙코르 와트를 방문하다〉, 서부원, 《오마이뉴스》, 2007. 2. 3
- ・ 〈밀림속의 앙코르왕조 400년 만에 깨어나다〉, 정성수, 《세계일보》, 2006. 2. 23
- ・ 〈압사라 댄스〉, 염미희, 《ASIANA culture》, 2005. 8
- ・ 《앙코르 와트》, 마릴리아 알바네스, 생각의나무, 2003
글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Etat es Science) 학위를 취득했다.
〈과학기술처〉의 해외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 등에서 태양에너지 발전 및 상변화 에너지 저장 등을 연구했으며
유학시절 프랑스 문부성이 수여하는 우수논문 제출상을 비롯해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jpg)
앙코르와트에 대하여...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함)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부를 이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근대 이전에 세워진 동남아시아의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어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친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바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켕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바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야바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 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jpg)

우주론적 사고와 도시 자체의 관계는
도시의 주요거주민과 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설정되었다.
중심부의 산 또는 피라미드나 사원은 '데바라자'라고 불리는 신격화한 왕이 주재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은 위대한 절대적 신격의 하나로 동일시되었고, 이런 동일시는
왕이 죽었을 때 중심부 사원을 왕의 개인 장례용 사원이나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앙코르에 있는 다른 많은 사원들 역시 인도의 우주론과 신화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중심부 사원을 새로 짓지 않은 왕이나 실질적 통치자가 아니었던 왕가 구성원,
또는 몇몇 경우에 특정 귀족들이 시바 신이나 왕국에서 섬기던 다른 주요신과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숭배장소로 세워졌다.
예를 들면 앙코르 유적의 사원 가운데 가장 거창하며 유명한 앙코르와트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자신의 유해를 안치하고 상징적·종교적으로
비슈누 신과 자신을 영원히 동일시할 수 있는 거대한 소우주의 건축물로 세운 것이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와트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캄보디아를 찾았던 초기 유럽의 방문객들은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으며,
1863년 프랑스의 식민정부가 세워지자
이 유적 전체는 학문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재능있고 헌신적인 프랑스의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이후에는 정부가 지원하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앙코르의 역사와 생활을 이끈
흥미진진한 종교와 정치체계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많은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고생스럽고 힘든 복원계획을 실행함으로써
고대의 사원·저수지·운하망을 원래의 장관에 어느 정도 가깝게 복구했다.
1960, 1970, 1980년대초에 일어난 캄보디아의 정치적·군사적 소요 기간에
앙코르의 사원들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도굴당하기도 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방치되었다는 점이었다. 
1976년, 앙코르와트 옆 숲속을 행군하는 크메르 루주.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전쟁과 약탈로 인해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소실, 전체 유적지의 70%가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의 왕궁에 있는
유물 1,000여 점이 도난 및 파괴되는 등 유적지의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해자의 다리와 벽에 기관총으로 생김 홈을 볼 수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인 1982년에
유적지 복구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있는 캄보디아인들
적절한 관리 부족으로 건물들은 급속하고 무성히 자라는 식물과
침식을 유발하는 물, 기타 자연현상으로 황폐해졌다. 
- 29226 휘문56회 서갑수 휘문56산우회 ‘20년 02월 정기산행(제300회) 안내 2020-02-03
- 29225 휘선회 이순실 立春大吉 (입춘대길) 2020-02-02
- 29224 휘선회 이순실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국보 제95호) 2020-01-28
- 29223 휘선회 이순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국보 제68호) 2020-01-26
- 29222 휘선회 이순실 휘선회 2020년 1월 정기산행 결과보고 2020-01-21
- 29220 휘선회 이순실 도시의 사원, 사원의 도시 - 앙코르와트 2020-01-19
- 29219 휘선회 이순실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2020-01-18
- 29218 휘선회 이순실 Ratto di Proserpina - Gian Lorenzo Bernini 1621-1622 2020-01-11
- 29217 휘선회 이순실 의사의 건강수칙 ‘배부른 듯 식사하기’… 어떻게 먹을까? 2020-01-11
- 29216 휘선회 이순실 역대 송년산행 단체사진 모음 2020-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