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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종:다문화사회(이민족교류)와 2번의 반정 (이충로)
1. 향화인으로 건주삼위(본위,좌위,우위) 선유관 등을 거쳐 조선의 고위직(왕실 경호대장)에 오른 동청례는 오도리 건주좌위 중 명나라에 기울지 않고 조선에 계속 번호로 남아 있던 오도리 추장 동소로가무의 아들로서 이들 부족은 조선 동북면(경원,회녕 등 육진 지역)에서 때로 난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 해서, 건주, 동해 등 모든 여진족들을 막아주어 조선의 안녕을 유지시켜주었던 것이다. 중종반정(1506년) 후 논공행상에서 귀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되자 그는 추후 신복의사건에 연루,역모죄로 처형(1508년)되었다. 동청례의 소식을 접한 조선동북면의 오도리부족은 조선조정을 불신하고 이들은 조선에 대해 "반드시 보복하겠다" 맹서를 하고 조선의 동북면을 떠나, 이미 태종,세종 때 명나라에 기울어 요동의 파저강으로 이동한 건주좌위 본위와 합류하고 조선의 동북면은 동해여진과 해서여진 세력이 나타나는데 선조임금 때는 연해주의 동해여진을 대체하여 홀온이라는 부족이 나타나는데 홀온은 다름아닌 현재 길림성 영길을 근거지로 하는 해서여진4부 중의 하나인, 우라부를 조선조정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건주여진이 동청례사건으로 떠나자 송화강 유역의 우라부가 우리의 두만강을 너머 육진으로 홀온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의 중종반정은 세종이 그토록 힘써왔던, 조선을 사모했던 건주여진에 대한 소통을 잘라내고 그 후 조선 조정을 장악한 문인 사대부로 인하여 국방과 외교에 대한 무관심과 무대응이 결국 남쪽 왜인에 대한 소통에서도 현실로 나타나 삼포왜란 등을 거쳐 임진왜란으로 까지 확대된 것이다. 2. 우리는 선조임금하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왜인의 7년전쟁만을 알고 있는데 선조40년 1607년 우리나라 함경도 경성부근 오갈암이라는 곳에서 건주여진 누르하치 패륵의 철기 3천과 해서여진 우라부(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홀온) 부잔타이 패륵(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홀추 탁고-이 부잔타이의 질녀인 아바하이-효열무황후-의 아들이 바로 병자호란 때 선조임금의 무릎을 쳐서 청태종에게 3배9고두를 하게 만든 9왕 도르곤이고 산해관을 너머 1644년 북경성을 점령한 장본인) 철기 만명이 전투를 벌였는데 이 대전에서 우라부는 대패하여 건주여진에 복속된다. 우리 역사가는 다만 홀온이 1607년에 망하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 홀온의 정체는 바로 우라국인 것이다. 이 우라국인 부잔타이가 1613년 예허에서 객사하고 망한다. 다시 돌아가서 선조임금 당대에 이 땅에서 왜놈과의 전쟁, 여진족들끼리의 주도권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광해군 당대에는 광해군의 혜안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서북방 여진족들과의 소통불능-명나라만이 황제의 나라여서 청나라 황제를 인정할 수 없고 재조지은을 잊을 수 없어 청나라를 도울 수 없다-으로 동쪽의 고려(조선)의 저항을 끝장내고자 청태종은 조선의 임금 인조에게 완전한 항복을 하게 한다. 세종이 살아계셨다면 이민족과의 소통으로 최소한 이런 대형사고 즉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설혹 일어났다해도 이길지언정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참고로 청나라 청태종도 누르하치의 최후의 적인 예허국 나란부루 패륵의 여동생인 멍구저저의 아들인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여진 오랑캐라고 낮추어 보는 그들의 도량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심양고궁에 가면 청태종의 마누라 중의 마누라 5인의 침실이 있는데 그 마누라들이 모두 여진족이 아닌 몽골족이고 그녀들의 아들이 바로 북경성에서 처음 황제노릇한 순치제이므로 청황실의 피는 만몽혼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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