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커뮤니티 메인

휘문교우회 로고
📖 게시글 상세보기
[제목] 가족 이야기 (애비)
경험론의 원조격인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수상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처자를 가지는 자는 운명을 볼모잡힐 것이다. 그것은 처자는 선이든 악이든 대사업에 옴짝달싹 못하게 늘어붙어 방해가 되므로.”

베이컨이 결혼을 했는지 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스콜라철학에 반대하여 모든 선입견과 오류, 바꿔말해 관념으로서의 우상을 없애고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지식의 원천으로 생각한 경험론을 주창한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위의 말 또한 경험에서 귀납적으로 뱉어낸 결론이 아니었을까싶다. 그렇다면 위대했던 철학자로 칭송받는 베이컨도 ‘옴짝달싹 못하게 늘어붙어 방해가 됐던’ 처자식과 자신이 오로지 지향하고 싶었던 ‘대사업’ 사이에서 자못 고단했던 모양이다.

최근에 내가 책으로 펴낸 수필집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엔 이십대를 살고 있는 아들 둘과 딸 아이, 그리고 거의 삼십년 함께 생활해온 아내에게 보내는 몇몇 편지글이 수록되어 있다. 어떻게 살든 사는 것 자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 쌓는 ‘부채의 축적’일진대, 뭐 딴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해서, 책의 서문에 가족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식의 헌사를 써넣었더니, 더러 만나는 독자들이 내가 무슨 가족사랑이 남다른 사람인양 말하니 듣기에 민망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만약 덮고있던 이불 속에서 쏙 빠져나가듯 무탈하게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족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비교적 원만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렇지만 ‘원만하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때론 혹독한 노동도 견디고 때론 분열의 상처도 참고 또 때론 극적인 투쟁도 수행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부모자식간도 마찬가지고 남편과 아내 사이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이컨이 말한 바 ‘대사업’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세상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가족’이라는 질기고 잔인하고 눈물겨운 ‘함정’에 빠져 그들이 순수한 젊은 열정으로 꿈꾸었던 ‘대사업’을 포기하거나 축소해왔을까.

사회의 온갖 부정과 비리도, 오로지 경쟁일변도의 팍팍한 환경도 대부분 애당초 지향했던 큰 이상, 곧 ‘대사업’을 포기하거나 사업계획을 축소 변경한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가족이 없다면 아버지들의 ‘부정’과 어머니들의 ‘이기주의’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또 있다.
지금 나는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곧잘 “당신 된장국 솜씨는 거의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아”라고 말하고, 아내는 그럼 “그래요?”하면서 활짝 웃는다. 신혼시절엔 밥상 앞에서 젊은 아내가 “국 어때요?” “나물맛 어때요?” 눈빛 빛내면서 묻고, 남편은 간사하지 않고 근엄해야 된다고 배웠던 나는 “어떻긴 뭐 어때” 퉁명스럽게 내뱉곤 그만이었다. 너무 뚝뚝하고 칭찬에 인색해서 젊은 아내의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본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 삽화들을 떠올리면 요즘 밥상 앞에서 된장에 풋고추 꽂히듯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나와 아내의 대거리는 미상불 따뜻하기 그지없으니 ‘가정적’이다.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어느 땐 ‘입신의 경지’라고 부른 아내의 된장국을 먹으면서 속으로는 쓸쓸하다. 예나 이제나 된장국이야 거기서 거기, ‘입신의 경지’라는 말은 그만큼 부부생활에서의 테크닉이 늘었다는 것이고, 아내 또한 그걸 알고 있을 터이다. 이를테면 허위의 평화다. 내 ‘허위’를 받아넘기는 아내의 ‘허위’도 세련되기는 마찬가지다. 야박하게 따져 말할진대, 늘어난 것은 된장국 맛이 아니라 사술인 셈이다. 사술이 쌓여서 평화가 된다.

가끔 나는 눈빛을 빛내며 음식 맛을 물었다가 퉁명스런 대꾸에 눈물이 핑 돌던 예전의 아내가 그립다. ‘사술의 평화’보다 ‘진실의 불화’가.

원고를 쓰다말고 깊은 밤, 잠에 빠진 가족들의 방을 하나씩 들여다볼 때가 있다.

기미가 낀 아내의 피곤에 지친 얼굴은 슬프다. 내가 젊은날 캠퍼스를 함께 걸어나오면서 보았던 시린 눈빛, 단아한 이마는 모두 무너지고 없다. 잔주름이 날로 늘어나는 중년여자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촉수 낮은 꼬마전구 불빛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참혹한 일이다. 그곳엔 서로 부대끼고 살아온 세월동안 아내와 내가 함께 상실해온 것들이 슬프게 깃들어 있다.

잃어버린 ‘대사업’의 꿈같은 것. 그 눈물겨운 결핍. 그제서야 나는 돌아나오며 남은 세월을 좀 전에 들여다본 그 여자, 아내의 상실과 함께 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슬프긴 젊은 아이들의 잠든 얼굴도 마찬가지다. 새로 대학에 편입해 들어간 딸애는 이불을 머리꼭대기에 감고 있고 이제 막 사회에 나온 큰 아들은 지쳐 숨결이 가파르다. 잔인한 시간에 밀려 종내 상실하고말 열정과 이상과 순결 따위를 혹은 지켜내려고, 혹은 이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