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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해주최씨 영철이의 조상님 만나뵙기 (머털이)
🧑 정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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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6 22: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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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1
최경창 崔慶昌 [1539~1583]
본관 해주(海州). 자 가운(嘉運). 호 고죽(孤竹). 박순(朴淳)의 문인.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리었고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이라고도 일컬어졌다. 1568년(선조 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1583년 방어사(防禦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죽었다. 시와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프로필을 보니까 영철이가 이 할아버지 닮은 것 같네. 글 잘쓰고, 악기도 잘다루고. 연애담은 좀 그런가
다른 친구들은 아래 참조링크로 가서 한번 찾아보시유
최경창과 홍랑의 만남
묏버들 가려꺽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줄 여기소서
홍랑의 대표시다. 조선명문가로 이름 높았던 해주최씨의 선산이 있는 경기도 파주군 다율리에 최경창의 묘 아래 홍랑의 묘가 있다. 최경창과 홍랑의 만남은 최경창의 나이 34세에 북도평사로 함경북도 경성에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비록 변방의 천한 신분인 기생이지만 미모와 교양을 겸비하여 시를 나눌 정도의 지식인이었으며 서로는 시우(詩友)로서 시와 풍류로 나누며 사랑도 키워간다. 6개월간 짧은 만남뒤, 오랜이별 그리고 전란을 당하여 사랑하는 님의 시고를 지고 변란을 피하였던 이 여인은 당대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파격적인 대우로 기생의 신분으로 연인의 선산에 묻힐 수 있었다.
이별의 장소에서 최경창은 시 한수를 읊는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조선 후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1654~?)의 문집인 「회은집」에는
"홍랑은 고죽이 죽은뒤 스스로 얼굴을 훼손하고 파주에서 묘를 지켰다 한다. 임진왜란중에는 고죽의 시고를 등에 지고 피난가서 병화에 소실됨을 피할수 있었다.... 홍랑이 죽자 고죽의 산소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관 해주(海州). 자 가운(嘉運). 호 고죽(孤竹). 박순(朴淳)의 문인.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리었고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이라고도 일컬어졌다. 1568년(선조 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1583년 방어사(防禦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죽었다. 시와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프로필을 보니까 영철이가 이 할아버지 닮은 것 같네. 글 잘쓰고, 악기도 잘다루고. 연애담은 좀 그런가
다른 친구들은 아래 참조링크로 가서 한번 찾아보시유
최경창과 홍랑의 만남
묏버들 가려꺽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줄 여기소서
홍랑의 대표시다. 조선명문가로 이름 높았던 해주최씨의 선산이 있는 경기도 파주군 다율리에 최경창의 묘 아래 홍랑의 묘가 있다. 최경창과 홍랑의 만남은 최경창의 나이 34세에 북도평사로 함경북도 경성에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비록 변방의 천한 신분인 기생이지만 미모와 교양을 겸비하여 시를 나눌 정도의 지식인이었으며 서로는 시우(詩友)로서 시와 풍류로 나누며 사랑도 키워간다. 6개월간 짧은 만남뒤, 오랜이별 그리고 전란을 당하여 사랑하는 님의 시고를 지고 변란을 피하였던 이 여인은 당대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파격적인 대우로 기생의 신분으로 연인의 선산에 묻힐 수 있었다.
이별의 장소에서 최경창은 시 한수를 읊는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조선 후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1654~?)의 문집인 「회은집」에는
"홍랑은 고죽이 죽은뒤 스스로 얼굴을 훼손하고 파주에서 묘를 지켰다 한다. 임진왜란중에는 고죽의 시고를 등에 지고 피난가서 병화에 소실됨을 피할수 있었다.... 홍랑이 죽자 고죽의 산소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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