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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 몇 살이야 (백운학)
성석제 꽁트 2탄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말대로 그는 위와 아래를 서로 부르는 직장에서, 호칭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왔다. 계급이 인격의 고하를 가름하는 기준으로도 적용이 되는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 스스로가 일거에 상류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고시공부를 한 덕분에 남보다 몇 년
늦게 평범한 직장인이 된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그의 승진은 같은 연배의 사람보다 늦었고 마흔을 한두 해 앞둔 요즘 고참 대리로서, 노후 연금 보험에도 신경이 쓰이는 그로서는 공연히 나이 어린 상급자나 신입사원 괴롭히는 일이 없다면 직장 생활을 계속할 재미가 없는 터였다.

그래서 술자리 같은데서는 부러 김과장, 박 차장 하는 식으로 막 불러대, 그래도 나이 대접을 해주려는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이나 붙여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높은 사람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약한 사람은 괴롭히려는 고약한 근성이 있다는 것이 평소 그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갓 들어온 사원들을 하인배 부르듯이 여봐라, 저봐라 해온 것이나, 같은 대리끼리도 아예 '해라'로 막내 동생 취급을 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막 출근해서 자동판매기에서 뽑아온 커피잔의 따뜻한 감촉을 즐기고있는 그에게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공장에서는 한창 라인이 신설되는 중이어서 자재 수급을 맡고 있는 그도 제정신을 차릴 수가 기는 했다. 열흘 전에 도착해야 할 동력전달축이 아직 수주처에서 선적도 안됐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
소장에게 어떻게 말을 할까, 그러지 않아도 고민 중이었다.

"당신이 조 대리요?" 전화는 대뜸 시비조였다.
"누구십니까?"
"나, 건설 현장의 김 과장이오."
"그런데요?"
"왜 물건을 보내주지 않는 거요?"
"발주처에 사정이 생겨서....."
현장에 새로 온 과장이 있는데 '손을 볼 필요가 있을 정도로' 약간 건방지다는 이야기는 그도 듣고 있었다.
"아니, 무슨 사정이 있기래, 늦으면 늦는다는 연락도 못해요? 그러면서 공사 기일은 맞추라고 하니 우리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라도 가진 줄 아시오?"
김 과장이라는 자는 거래처와 어떤 사이길래 그렇게 봐주느냐 하는 식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그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냈다는 듯이 부장을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무슨 큰 죄라도 진 듯이 미안해, 미안 미안해를 노래
가사처럼 연발하며 통화를 끝낸 부장은 그를 불러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고, 그는 또 열이 뻗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공장의 과장인 주제에, 감히 본사의 부장까지 을러대는 이 정체 모를 괴한을 길들일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신중히 계획을 세운 끝에 전화를 걸었다.

"김 과장 좀 부탁합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님'자를 뺀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장'자에 힘을 주었다.
"난데요"
그의 기대대로 상대는 뻣뻣하게 나왔다. 그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네가 나면 나도 나다.
"나, 아까 통화한 조 대립니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저'가 아니고'나'이며, '여쭤보는 것'이 아닌 '물어보는 것'이었다.
한국식 언쟁은 처음에는 문제 때문에, 다음에는 호칭 때문에, 마지막에는 서로의 버릇 없음 때문에 싸우는, 일련의 절차를 밟는다. 결과적으로 애초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빨리 물어봐요. 바쁜데 귀찮게 하지 말구."
대꾸가 퉁명스러운 걸로 봐서 미끼를 무는 기색이었다.
"물건을 빨리 대라, 빨리 대라 하는데 도대체 하역할 데나 마련해놓고 하는 소리요? 보내봤자 받지도 못할 거면서 뭘 빨리 해내라고 그래요?"
"아니 이 양반이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걸렸구나! 수화기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양반이라니, 당신 과장이라고 말 함부로 해?"
"뭐, 당신?"
"그래 과장이면 다야! 대리면 그냥 대린 줄 알아? 당신 몇 살이야?"

그는 옆구리를 찔러오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지만 그것이 자신보다 나이 어린 과장의 것인 줄만 여겼다.
이놈들아,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나이 많은 놈이 왕이란 말이다.
그는 유유히 기다렸다. 상대는 잠시 침묵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 당신 부장하고 대학 동기 동창이야, 나이는 당신네 윤 부장한테 물어봐."
글쎄 그게 몇 살이야, 라고 언제부터인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부장 앞에서 차마
물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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