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파와 시아파의 유래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 사후에 그의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둘러싼 대립으로 인해
대다수 무슬림은 선출된 대표자가 후계를 이어 정통파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보고
또 일부에서는 무함마드 핏줄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분열이 발생했다
경전과 무함마드의 순나(말, 행동, 관습)을 따르는 다수는 수니파가 되었고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와 그 후손만을 정통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가 소수 시아파가 되었다
수니파는 합리적 해석을 중시하는 방면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손의 무덤 순례를 강조한다
전 세계 무슬림 인구 중 85~90%가 수니파, 10~15%가 시아파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세계 대부분이 수니파인 것에 비해 페르시아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이란과
그 주변 국가들인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등은 시아파가 많이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은 후계자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간의 갈등도 있는 복잡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문제로 분리된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결은 1400여년간 계속 갈등을 빚고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승자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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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슬람권의 90% 정도가 수니파이고 10% 정도가 시아파입니다.
하지만 두 종파로 구분하기 애매한 소수 종파도 적지 않습니다.
시아파는 지금의 이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반면
수니파는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수니(Sunni)파
이슬람의 가장 큰 종파이자 전 세계 무슬림 10억 인구의 90%를 차지해 ‘정통’을 자처합니다.
신의 말씀인 코란과 함께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과 관행을 의미하는 수나(Sunnah)를 따릅니다.
이슬람의 주류(90%)를 이루고 있는 수니파는
원칙적으로 알라와 신자 사이의 성직자(목사, 신부 등)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직자 없이 사원이 운영됩니다.
처음부터 수니 종파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아파가 주류집단을 박차고 떨어져나가자
예언자 언행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집단이란 의미로 기존 집단을 수니로 불렀습니다.
공동체의 관습을 허용하는 등 세속적으로 교세 확장한 까닭에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등
새롭게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국가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합니다.
◆시아(Shi’ite)파
시아는 ‘시아트 알리(Shiat Ali)’의 약칭으로
이슬람의 4대 칼리프(정교일치의 최고 통치자) 알리를 추종하는 종파 집단입니다.
무슬림 전체의 10%를 차지하며 주로 이란·이라크에 분포합니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적통 계승이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에게 있다고 보고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만 이맘(종교지도자)으로 받듭니다.
시아파(주로 이란)는 성직자인 ‘이맘’을 알라의 메신저로 간주합니다.
이 ‘이맘’의 수령을 ‘아야톨라’라고 부르며 호메이니가 바로 그 직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와 이슬람 지도자(주로 학자)가
별개의 세계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으나
이란은 무슬림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가 정치 지도자를 겸하고 있습니다.
시아파의 최대 종주국은 이란이고, 시아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와 오만, 예멘, 레바논, 바레인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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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로 무하마드의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또 그는 두 번째 이슬람 개종자로서 탁월한 용맹성과
지혜를 가졌으며 시종일관 무하마드의 곁에서 성실하게 그를 보필했습니다.
632년 무하마드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프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리의 추종자들은
예언자의 혈육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에서는 아부 바크르(632~634)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습니다. 슈라에서 만장일치 합의제(이즈마)로 칼리프를 선출하는 방식은
초기 이슬람 사회의 전통으로 굳어졌습니다. 2대 칼리프 우마르(634~644),
3대 칼리프 오스만(644~656)이 이 방식으로 선출됐습니다.
하지만 우마르와 오스만 모두 예배 도중 반대세력에 의해 무참히 피살됐고
이후 알리가 4번째 칼리프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알리가 오스만의 살해세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무하마드의 부인이자 오스만을 지지했던 아이샤의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됐습니다.
두 세력간의 알력은 전쟁으로 비화됐고
656년 최초 이슬람 내전이라 할 수 있는 낙타전투에서 알리가 승리합니다.
그러자 오스만의 사촌이었던 무아위야가 알리에게 대항했습니다.
창 끝에 코란을 달고 돌진하는 무아위야의 군대를 향해 알리는 화해를 요청했고
협상을 성사시켰습니다. 하지만 화해 협상에 대해 불만을 품은 알리의 강성 추종자는
661년 알리를 살해합니다.
두 번의 배반 후 완전히 갈라져
시아파는 알리의 장자인 하산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적 군대를 가졌던 무아위야는 스스로가 칼리프임을 선포했고
하산에게 칼리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하산은 다음해 갑자기 목숨을 잃습니다.
시아파들은 무아위야가 하산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은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여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동안 칼리프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합니다.
이는 무아위야의 사후 칼리프직을 후세인에게 물려주겠다는 묵시적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680년 무아위야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야지드는 약속을 깨고
칼리프직을 찬탈했습니다.
후세인은 즉각 야지드에 대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680년 시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카르발라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장렬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모두 처참히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 전투에서 후세인의 어린 아들 알리만
겨우 피신해 시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카르발라 전투 후 이슬람 세계에서 정통 칼리프 시대는 끝나고 왕조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시아파들은 통한의 응어리를 안고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별도의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후 예언자의 혈통인 후세인이 무참하게 도륙당한 680년 이슬람력 1월10일은
시아파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됐습니다. 후세인 묘당이 있는 카르발라는 시아파
최고의 성지가 됐으며 1월10일은 그의 무덤을 순례하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 됐습니다.
모든 시아파 순례객들은 예리한 칼로 자신의 몸을 난자하며 피를 뿌리는
끔찍한 행진을 합니다. 당시 후세인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다는 종교적 동일체 의식의
표현인 것입니다. 동시에 예언자의 혈족을 살해하고 종교적 신성함을 훼손한
수니파에 대한 역사적 원한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칼리프직을 찬탈했던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조는 750년 아부 알 압바스 장군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때 무하마드 가문 출신인 압바스는 시아파의 절대적인 협력을
받으며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후세인의 증손자인 자파르 알 시디키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칼리프로 옹립하려는 구상을 했습니다.
하지만 754년 압바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 만수르가 자파르를 살해하고
자신이 칼리프로 취임했습니다. 시아파로서는 두 번째 배반을 당한 셈입니다.
이 왕조가 압바스 제국으로 1258년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간 이슬람 세계를 지배합니다.
시아파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몇몇 시아파 왕조를 건설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현재 이란 지역에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가 들어선 후 대다수 국민들이 시아파로 개종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최대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모태입니다.
이처럼 수니파와 시아파는 교리적 논쟁이 아닌
계승권 분쟁을 둘러싼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갈라졌습니다.
혈통 계승을 주장하는 시아파에게 유일한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사촌인 알리뿐입니다.
그 전 세 명의 칼리프는 찬탈자로 간주합니다.
이런 정치적 견해 차이를 제외하면 두 종파간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습니다.
코란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마지막 예언자 무하마드를 따르는 기본적인 코드는
서로 같습니다.
결정적 의식의 차이 ‘아슈라의 날’
그럼에도 두 종파는 의식의 실행과 종교적 관점,
이슬람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왔습니다.
가장 뚜렷하고 결정적인 의식의 차이는 ‘아슈라의 날’에 나타납니다.
아슈라는 후세인이 순교한 이슬람력 1월의 열흘간을 의미합니다.
카르발라 전투에서 후세인이 처참하게 전사한 고통을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사이파는 자신의 가슴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칼로 긋는 행위(마아탐)를 통해
당시 후세인의 죽음을 방치한 나태함에 대한 참회(타으지아)를 합니다.
후세인의 순교 정신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시아파는 이런 참회의식 행하면 최후 심판의 날에 후세인이 중재자로 등장해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수니는 역사를 왜곡하고 알리와 후세인에 대한
그릇된 종교의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이 행사의 과격성과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두 종파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우선 이슬람의 기본 의무인 예배에 있어 수니파는 시간에 맞춰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 보는 것을 철저히 지킵니다.
하지만 시아파는 상당한 융통성을 부여합니다.
예배를 묶어서 한꺼번에 보기도 하고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세 번으로 줄이기도 합니다.
선 자세에서 두 손을 배 위에 올리지 않고,
절을 할 때도 바로 바닥에 이마를 대는 것이 아니라
카르발라에서 가지고 온 작은 돌조각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절을 합니다.
이슬람 첫 번째 원칙인 신앙 고백(샤하다)에서도
수니파는 “알라는 유일신이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도임을 증언한다”는 구절을 암송하지만,
시아파는 이 구절에 알리에 관한 구절(알리는 신의 대리인이며,
예언자 무하마드의 계승자이며, 최초 칼리프다)을 첨가합니다.
예언자 무하마드에 대해서도 수니파는 ‘그가 원래 무학의 인물이었으며,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단순한 임무만을 부여받은 보통 인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시아파는 ‘무하마드가 높은 학식을 소유했던 완전무결한 존재였으며
신의 빛을 부여받고 신적 속성을 소유했던 인간’이라 주장합니다.
나아가 시아파는 그런 속성이 무하마드 딸 파티마, 그녀의 남편 알리,
그리고 이들의 자손들에게도 부여됐다고 주장합니다.
수니파는 시아파가 주장하고 있는 알리와 그의 자손 중심의 이맘(종교적 지도자) 제도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맘 제도와 관련해 시아파는 873년경 은둔한 12대 이맘이 마흐디(메시아)로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12대 이맘이 마흐디로 재림함으로써
이슬람 공동체는 궁극적인 정의와 평등, 단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물 중심 종교활동이 강한 시아파
이슬람 법 적용에 있어서도 수니파는 한발리파, 말리키파, 샤피이파, 하나피파 등
정통 4대 법학파를 모두 인정한 반면 시아파는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가
편집하고 성문화한 ‘자파르 법전’만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신앙의식에서도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인물 중심의 종교활동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시아파의 성인 숭배 의식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무하마드 가문 출신의 성인들에 대한 숭배 의식과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주요 시아파 지도자들 묘소에 대한 방문과 순례가 주기적으로 이뤄집니다.
이란의 주요 기관이나 가정에는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그리고 카르발라 전투 등에 대한 사진들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수니 세계에서는 그런 사진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아파는 계약결혼제도인 ‘무트아(mu’tah)’를 인정합니다.
무트아는 무하마드 시대에 일부 허용됐으나 수니파에서는 죄악으로 금지합니다.
시아파 국가인 이란 여성운동가들은 ‘일생동안 13명 여성과 결혼했던 예언자
무하마드도 처녀와의 결혼은 단 한 번뿐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사회의 지나친 고정관념을 깨고
기혼 여성의 자유로운 결혼을 확대하는 방편으로 무트아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여성의 상속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합니다.
이란 여성의 정계 진출과 전문적 사회활동이 다른 아랍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것은 이런 시아 교리의 영향이 큽니다.
시아파의 또 다른 특징은 ‘따키야(taqiya: 거짓 믿음)’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시아파는 수니파의 정치적, 종교적인 박해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종교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거짓으로 자신의 신앙을 숨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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