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김일성)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이는 박헌영이 북한에서 1956년 12월 어느 날 감옥에서 끌려나와 야산에서 총살당하기 전에 한 말입니다. 독하고 담대하기로 유명한 그가 죽기 전에 처자식을 외국으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한 김일성이 보고 약속을 꼭 지켜달라고 당부하는 장면이 필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박헌영(1900 - 1956)은 질곡(桎梏)의 삶을 살면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그는 충남 예산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농사도 짓고 쌀장사도 하면서 생계를 꾸려 갔습니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여 홍길동전에 특히 관심이 컸다고 합니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예산에서 경성고보에 입학할 정도면 상당한 수재였습에 틀림없습니다.
집안이 어려워 고학도 하고 YMCA에 다니며 영어공부도 하였는데 이는 미국 유학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습니다. 1919년 경성고보를 졸업합니다. 미국유학은 돈이 없어 포기하고 대신 일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밀항합니다. 일본에서도 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이번에는 상해로 망명합니다. 중국 상해에서 김단야, 임원근을 만나 이르쿠쯔크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합니다.
1922년 여운형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 대회에 참가합니다. 1920년 조선 공산당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코민테른에서 받고 입국하였으나 즉각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반을 살고 1924년 허헌이 사장으로 있는 동아일보 기자가 됩니다. 그리고 1925년 4월 조선 공산당을 창당하며 책임비서에 선출됩니다. 같은 해 11월 아내 주세죽과 함께 체포되어 또다시 복역하는데 이번에는 자기가 싼 변을 먹는 등 정신병자를 가장하여 병보석으로 출감됩니다.
1928년 11월 국내를 탈출하여 울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한국인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1929년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 노동자 공산대학에서 2년 수료합니다. 1933년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잡혀 국내로 송환되어 징역 6년을 삽니다. 출옥하여 또다시 활동하다가 체포될 것 같아서 전라도 광주의 기와 공장에서 공원으로 일하다 해방을 맞이합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이현상(나중에 빨치산 총책이됨) 김 삼룡등과 공산당 재건을 시작합니다. 그는 남한의 공산당 총책으로 ‘모험주의’을 선호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미국, 영국, 소련)회의 결정으로 한 반도를 미 영 중 소 4개국 신탁통치를 하기로 결정하자 박헌영은 소련의 신탁통치만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소련의 종이었습니다. 이승만과는 이념의 차이 때문에 사이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자 미 군정은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박헌영도 격렬한 저항을 하기 시작합니다. 1948년 9월 관속에 들어가 관을 실은 영구차를 타고 월북합니다. 그는 조선 노동당 부 위원장의 직책을 맡습니다. 그를 따라 월북한 인사들이 적어도 수 천 명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박헌영을 신격화했고 박헌영이 없는 노동당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의 정치기반은 어디까지나 남한이지 북한에서는 손님의 신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박헌영은 처음에는 사사건건 김일성과 다투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김일성을 우두머리로 인정하고 그의 눈치를 보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남으로 밀고 내려가면 남노당원이 적어도 20만 명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박헌영의 엄청난 말의 실수 였습니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민간에서도 군에서도 남노당 당원들의 봉기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 2만명 정도가 최후의 항전을 한 것이 박헌영에 대한 충성이라면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헌영은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 한국전쟁의 책임을 지고 체포됩니다.거기에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노동당 부위원장이며 북한의 외상이 미제 간첩이라는 것은 전혀 날조된 죄목이지요. 1955년 그는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관이 미국 간첩이 맞느냐고 물으면 공손히 ‘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본 그의 측근들은 박헌영이 절대로 간첩이 아닌데 왜 저렇게 대답했는지 궁금해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재판정에 나오기 전 박헌영을 빈방에 넣고 밖에서는 커다란 개들을 풀어 그에게 달려들어 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간첩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또 개한테 물릴 공포가 떠오르니까 무조건 ‘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625전 남로당 서울 총책을 지낸 박갑동씨의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박헌영;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며 베이징을 찾아 다니며 남한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게 해 달라고 애원했던 전쟁광. 김일성에게는 남조선에 내려가면 수만 수십만의 남로당 당원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그릇된 정보의 제공자. 마치 양 눈의 옆을 가리우고 달리는 듯한 말 같은 저돌적인 공산주의자. 그가 월남의 호지명이나 중국의 주은래 혹은 등소평 같은 유연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면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그의 정치적 생명이 좀 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사고의 경직성은 사고의 간 경화증이었습니다.
생전에 그는 결혼을 세 번 하여 세 부인 모두에게서 아이들을 낳았는데 첫 번 째 부인 주세죽 사이에서 난 박 비비안나(1928-2013)는 무용 전공으로 러시아에서 대학교수를 지냈고
두 번 째 부인 정순녀 사이에서 난 아들이 현 조계종 원로 스님으로 선출된 원경스님(74)이고 평양에서 김일성이 축하하는 가운데 결혼한 윤옥비서 사이 에서난 두 아이, 그러나 박이 죽은 후 이 세 모녀의 소식은 알 길이 없습니다.
남에서 올라간 남로당 출신들 수천 수만이 그들의 총책 박 헌영과 함께 이슬처럼 사라졌는데 그리고 살인마 김일성이 통치하고 그 아들이 이어받고 그 손자가 이어받은 북한이 거덜이 나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여러 개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십만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두어 굶어 죽이는 북한의 위정자들. 공산주의가 돌연변이하여 거대한 우상숭배의 왕국이 된 북한. 그런데 남한의 일부 배북홍충(拜北紅虫...북쪽에 절하는 붉은 벌레)들, 제 2 제 3의 박헌영이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족:
서울시장 박원순이 1986년 박헌영의 사생아 원경이라는 승려와 함께 역사문제연구소를 세우고,
역사교과서 집필 교수출신 9명 가운데 역사문제연구소 출신이 7명으로 종북좌편향 역사교과서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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