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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km
🧑 김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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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19 09: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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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6
서울과 달라 내가 사는 시골은 오전 7시에 첫차, 오후 9시에 막차가 다니고
거의 2시간마다 한대씩 버스가 지난다.
막내 봉사활동때문에 잠시 냉전 상태인 호랭이와 묵언 시위를 계속하던 중
무지 무지 심심해서 마침내 버스를 타고 외출할 결심을 한다.
전날은 제주도에 내려온 이후로 가장 허벅진 눈이 내렸지만
땅에 닿기가 무섭게 녹아버려 눈길을 밟아보질 못했기에
더 외로움이 가슴에 절절했었나보다.
11시 54분에 오기로 된 버스를 혹시 놓칠까봐 10분쯤 일찍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12시가 되어서야 길 저편에서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호랭이가 태워줬다면 10분도 안 걸릴 길을 돌고 돌아 30여분만에 읍내로 나갔다.
서울에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담배 한 보루를 사면 라이타를 하나
사은품(?)으로 주는데 읍내의 한 슈퍼마켓에서 끼어 주는 라이타가 마음에 든다.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근처 농협에 가서 현금을 약간 인출하고
호랭이와의 묵언 투쟁 중 하나인 결식으로 허기가 진 터라 관광객사이에도 맛있다고 알려진
자장면 집으로 가서 자장면을 한 그릇 시켜먹는데....
에고.... 예전 살던 화곡동의 일반 자장면 맛보다 별로 차이가 없다.
소문난 집이라 그런지 식객들은 빼꼭한데 내눈에는 다들 그저 그런 표정들이다.
며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는데도 깨작깨작 시장이 반찬이라 믿고 한그릇 비웠다.
2달에 한번꼴로 서울에 가면 맨 먼저 이발을 했었는데 지난 10월과 11월 서울에 갔을 때는
뭐가 그리 바빴는지 이발을 하지 못하고 내려왔는데
덥수룩한 머리가 후줄근한 파카와 퀭해진 내 모습과 함께 어울려 마치 노숙자같기에
자장면집 건너편 이발소로 직행했다..
허기를 채우고 외모도 단장을 하고 슈퍼마켓에 들러 담배도 한 보루 사고나니
읍내에 나와 볼 일은 다 본 셈이다.
반경 100m안에는 온통 녹색인 집과는 달리 그래도 읍내여서인지
오만가지 볼 것들이 많다.
...그런데 엔돌핀이 팍!팍! 돌 눈요기 거리가 없다.
-저급한 인간 취급당할까봐 그게 뭔지는 안 쓰겠지만 날 아는 놈이면 다 알지.ㅎㅎ -
읍이 아닌 시내까지 진출해볼까...도 잠시 갈등을 했지만
눈을 잠시 즐겁게 하려고 편도 1시간이 넘는 시내 나들이를 시도하기엔 쫌...그렇지?
방파제 안으로 정박한 빽빽한 어선들과 어우러진 항구도 봤으니
이젠 집으로 가자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흐미~!!
현재 시간 3시 40분-
버스 도착 시간 4시50분-
....에라! 걷.자.!
1116번도로를 따라 쭈욱 올라가면 1120번 도로와 만나고
1120번 도로를 따라 걷다 1132번 도로를 만나면 명월리 사거리까지 가면 된다.
1120번 도로로 들어서서 걷는 1.2km쯤 되는 길에서 해안쪽을 보면 경관이 기가 막히다.
손가락 한마디쯤 떨어진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섬이 비양도이다.

줌으로 땡기고 보면 한발 성큼 내디디면 바로 닿을 듯 가깝지만.....
직접 가보면 에고.... 깨갱...이다.
입을 헤~벌리고 눈은 바다에서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고 걷다보면 1132번 도로를 만난다.
여기가 왕복 6차선인가 8차선이라 차량 통행은 뜸하지만 무단 횡단하기에는
몸이 둔하고 여차직 사고라도 나면 어디 가서 하소연도 하지 못한다.
무단 횡단으로 괜한 개죽음 하지말라고 친절하게도 횡단보도가 있다.
이제나 저제나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 지루해 담배를 입에 무니 얼씨구?! 녹색불이다.
불을 붙히는 건 보류하고 일단 부지런히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러고 보니 1132번 도로는 그냥 길만 건넜구나.
다시 1120번 도로를 따라 쭈욱~ 올라간다.
명월리라는 곳인데 여기서부터는 정말 한갓진 길이다.
길 가다 어깨 부딫칠 일도 없고 이따금 지나가는 차량은 행여 내가 비틀거려
차선을 넘어올까 멀찌감치 비켜간다.

도대체 이놈의 동네에는 겨울이 뭐고 언제부터인지.....
길가에 아직도 꽃이 피어있다.
이 길은 1120번 도로이면서 명월성로라는 이름이 있다.
새로 바뀌는 지번에 내가 사는 집 주소가 명월성로 627번지이니
이 길을 따라 쭈욱 가면 집이 나올것이다.

명월성로로 들어서는 입구에 문화마을 명월리라는 안내판이 떡 버티고 서 있다.
길옆이고 교차로를 끼고 있는 탓인지 이곳은 그런대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한림항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얼추 3km쯤은 걸었나보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사람도 보이고 마을에 집도 눈에 띄니 도시에 살던 놈 입맛에 그나마
맞았는데...이제부터는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허허벌판에 심심산골이다.
좀 복잡하더라도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해서 편하게 집에 갈까...하다가
김 세형이 참 약해지긴 했구나싶은 자괴감이 든다.
장장 12일동안 이 제주도 해안도로를 도보로 완보했던 가락이 엊그제인데....
젠장! 가가 쓰러지더라도 갈 때까지 가보자!
마음을 다시 추스리고 걷는데......우쒸!! 언덕길이다!
처음에는 약간 걷기가 힘들다싶을 정도로 완만한 경사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건...끝없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지친다싶게 걷다보니 아무도 찾는 사람없을만큼 외진 곳에 '자고내 쉼터'라는
작은 공원이 있다.
이제 5km쯤 온걸까?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잠시 물도 마실 겸 걸음을 멈추고 저 쉼터 안에 들어가 쉴까..고민했지만
제주도도 겨울은 겨울이다.
잠깐 쉴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거칠어지고 찬 기운이 안으로 파고든다.
에라! 쉬다가는 얼어죽겄다.. 가자!
200m쯤 더 올라가니 대형단체 손님들이 이용하는 제주 힐 리조트가 보인다.
여기서 얼추 2km쯤 더 가면 내가 사는 집이다.

내가 집을 지을 때부터 있던 집인데 위치가 참 좋다.
보일락말락한 오른쪽 끄트머리의 2층 베란다에서 보면 바다가 보일거다.
하긴 내가 사는 집도 바다쪽 농장의 방풍림을 잘라내고 얼마쯤 더 높이 지었으면
바다가 보일텐데 ...에이! 이제와 남 원망해봤자 죽은 자식 부랄 만지기지....


내 집을 지을 때 비슷한 시기에 짓던 집인데 이제 완공이 되었나보다.
얼마전 돌담위에 설치한 조명이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으니 내가 사진작가쯤으로 보였나보다.
명함에 새겨넣게 저 집을 잘 찍어서 뽑아달란다.
음...나도 삼보민박 명함을 그렇게 만들려고 했는데....

...이렇게...ㅎㅎㅎ
각설하고 이제 여기를 지나 망오름(느지리오름)까지 오르막길만 견디면 나머지 길은 쉽다.

앗쭈! 이놈들 봐라?!
금악에서 만나는 말 시키들은 내가 가면 반기는데 이놈들은 내가 다가가니
엄마! 뜨거라! 도망간다?
에라, 이 시키들아!
나도 내 싫다는 놈하고는 말 섞기 싫다.
아싸!
1.5km쯤 헐떡이며 올라가니...
아! 여기가 한림과 협재가 갈라지는 망오름 삼거리다.
여기서부터 1.5km는 거저 먹기다.
평지 내지는 내리막길이니까....
이곳에서 바다를 보면 오른쪽에는 비양도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차귀도(아마도)가 보인다.
석양도 일품이고 여기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정말 기가 막히다.

24배 줌의 위력이다.
6.5km를 허위허위 걸어왔는데 망오름 삼거리에서 비양도를 땡기니 비양도 마을은 물론이고 등대도 보인다.

정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틀고 보니...저녁 빛내림이 장관이다.
아무리 셔터를 조절해도 원판 그대로의 장관은 찍어내질 못한다.

보여주고싶은데....
아무리 찍어대도 저 장관을 표현하기에는 내 실력이 택도 없다.

돌아서는데 이게 뭐지?

아! 언젠가 평화박물관이라는 곳을 귀농교육을 받을 때 다녀왔는데
제주도에는 별의 별 굴도 많고 특히나 일제 강점기에 물자 비축과 은신을 위해
수없이 많은 굴을 파놓았다고 했는데 인근에 산다는 한 귀농 교육인이
여기서 한림공원의 협재굴까지 굴을 따라 내려가곤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어릴적에는 시궁창같은 하수도구 맨홀 뚜껑아래를 비좁게 기어다녔었는데...
여기서 자란 애들은 천연동굴에서 진짜 모험심 가득한 탐험을 했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언제부턴가 옆에 차가 한대 서서는
복부인쯤...까지는 아니더라도 땅을 사고자하는 아줌마에게 아저씨가 열변을 토한다.
경치야 죽이지만... 한쪽은 망오름 산자락에 막혔고 한쪽은 절벽과도 같은 가파른 경사도인데
...하긴! 인간이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뭔들 못하리!
하지만 저 아래 재래식 돼지막사가 없어지지 않으면 여긴 이따금 냄새에 둔감해져야 할게요.ㅎㅎㅎ
다시.... 평지와 내리막 길을 따라 1.5km쯤 터벅대며 내려오니 반가운 집이 보인다.
시계를 보니... 5시30분!
얼추 2시간을 걸었구나.
"다음"에서 지도를 찍어보니 8km쯤 되네.
어제 18일 일요일에는 둘째가 방학이라고 내려왔다.
오랜만에 온 애 앞에서 네 엄마랑 싸워서 묵언 중이다..라고 하기엔 쪽 팔려서
조용히 밤에 불러 무릎꿇고 죽을 죄를 지었노라고 싹싹 빌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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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오늘 아침부터는 밥을 주더라.
제주도민 세형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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