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우리 아이들이 자살했다. 부모와 친지들의 큰 사랑을 받아 온 아이들이다. 유난히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많았던 아이들이다. 우리 과학과 기술의 미래 수준을 이끌어 가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아이들이다. 무엇보다도 한 명 한 명이 우리 아이들이다. 소중한 생명들이다. 인간은 생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생명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절대자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반자연적 행위다. 이런 일이 우리 주위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KAIST 서남표 총장이 학교 구성원들에게 보낸 e-메일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서 총장은 이 글에서 이 세상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궁극적인 해결책은 각자의 마음과 자세에 달렸다고 했다. 우리가 항상 이길 수는 없으며 나중에 이기기 위해 지금 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꼭 지금 해야 할 이야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차갑다. 학생들은 총장이 근본적인 원인은 직시하려 하지 않고 자살의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각자 노력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말하는 태도에 실망했다고 한다.
서가 귀퉁이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책 한 권에 눈길이 갔다. 에밀 뒤르켕(Emile Durkheim)의 『자살(Suicide)』이다. 19세기 후반에 출간된 이 책은 자살의 원인을 개인 심리적인 원인이 아닌 사회제도적 원인에 한정해 설명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자살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개인 심리적 원인과 연계하여 치열하게 설명한 당대의 수작이다. 뒤르켕은 한 사회의 통합능력과 정신 및 도덕적 규제능력에 따라 자살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운명주의적 자살 등이 그것이다. 사회의 통합능력과 정신 및 도덕의 규제능력이 각각 지나치게 높거나 낮을 때 특정 유형의 자살이 야기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 우리 아이들의 자살은 이기적 자살과 운명주의적 자살에 가깝다. 사회의 통합능력이 미약해 우리 아이들은 가정, 학교, 동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과 책임감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게 된다.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이 가장 외로운 존재라고 믿는다. 이로 인해 이기적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한편 지나치게 강한 정신적·도덕적 규범이 사회를 압도할 때 아이들은 운명주의적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지는 게임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다. 이들에게 패배는 곧 세상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대화를 원한다. 겉으로는 아니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다. 이들의 가슴은 여전히 부모를 향하고 있다. 학교의 선생님은 일방적 지식 전수만이 그들의 사명이라고 믿지 말아야 한다. 역시 머리가 아닌 가슴의 대화가 필요하다. 핵가족 시대에 살고 다자녀 가정이 드문 현실에서 동네 공동체의 어른들은 어른다운 역할을 해 줘야 한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신뢰를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아이들이 우리의 소중한 일부임을 알려줘야 한다.
아이들을 성공을 위한 무한 경쟁 궤도에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승리와 패배의 세상 원리를 미리 설파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사회에 나가면 자연히 겪게 되는 일이다. 아이들은 미래의 성숙한 사회인의 준비를 위한 지식과 사색의 내공을 쌓기 위해 대학에 온 것이 맞다. 경쟁과 승리는 과정일 뿐이다. 결코 목표가 될 수 없다. 지금은 우리 아이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때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 때다. 아이들의 손을 잡아 줘야 한다. 뜨겁게 잡아 줘야 한다.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