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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밑창을 갈다

구두 밑창을 갈다

 

76회  안 영 선

 

신발장에서 구겨진 구두 하나를 꺼낸다

후락한 표면 골짜기를 따라

차곡차곡 쌓여진 시간이 흘러내리고

광택 잃은 거죽엔 주인 손에 이끌려

우시장에 팔려가던 울음소리가 묻어 있을 것만 같다

경춘선 강바람이 드나들던 개찰구를 지날 때나

노점을 펼친 저잣거리 곳곳에서

때로는 나약해서, 의지를 구하러 다니던

성당이나 산모롱이의 산문(山門)에까지

그 보폭의 문수를 재던 내 무게의 뒷면.

 

낡은 걸음에 가끔씩 휘청대는 날이 잦았던 요즘

익숙한 걸음일수록 때론 밑창을 갈아야 함을 알았다

다른 그림자에 밀려 서서히 지워지는 보폭

수평으로 곱게 세상을 딛는 아내의 신발과 나란히 있는

이 중년의 걸음에

아내의 반짝이는 구두가 곱게 팔짱을 끼듯 기대어 있다

 

안축으로만 깎이는 시절

수선공의 손에 수평을 잃은 밑창이 잘려나가고

기우뚱한 생도 한동안은 반듯할 것이다

교체된 밑창이 새로운 걸음의 저기 저쯤이 되고

아내가 잠시 팔짱을 풀어도

이제 나는 수평의 한 때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