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마리 1 - 경악
🧑 김개석
📅 2004-03-31
👀 360
거의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태평양 건너의 정든 고향을 모처럼 방문 중이던 지난 1994년 한겨울 어느 날 저녁, 서울의 한 엄청 커다란 한식 식당 온돌 바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기 위하여 같이 간 친구들처럼 무심코 신고 있던 신발을 벗던 나는 한순간 정신을 잃었다. 내 발 밑에 놓여 있던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수십 켤레의 고만고만한 검정색 단화들의 획일성에 엄청 경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다소 이상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던 친구들은 나중에 내게서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그때까지 서로들 모르고 그냥 당연시 여겼던 자신들의 검정 구두 획일성을 드디어 인지하기 시작했다. 대체적으로, 숲을 밖에서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숲에 살면서도 숲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숲을 무조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만일 고향이 아직도 그런 검정식이라면, 그리고 특히 반주 삼아 한 잔씩들 걸친 상태라면, 제 신발들 못 찾고 아무 꺼나 비스므레한 것들 신고 나오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텐데, 내 추측이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
그 획일성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인지 폐막식인지에서 고국의 젊은이들이 보여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한 대규모 집단 체조 화면들을 숨죽이고 즐기면서, 나로서는 무척 대견스럽고 뿌듯하면서도 그 실수 없는 완벽한 획일성에 엄청 경악했고, 요즘 촛불 시위대가 들고들 있는 하얀 종이컵에 담겨 있는 듯한 길다란 하얀 양초의 획일성에 또 다시 경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곳 현지의 일부 언론들은 그 엄청난 촛불 시위대는 자발적으로 모인게 아니고 분명히 옛날처럼 강제로 동원된 것일 꺼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걸 들으니 나도 잠시 헷갈렸다, 곧 사태 파악을 하기는 했지만서도.
참고로, 여기서 그런 촛불 시위가 일어난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전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크고 작고 동그랗고 네모나고 알록달록한 그런 끝도 없이 다양한 것들이 밤길을 총천연색으로 수놓을 것이다.
한편, 얼마 전에 이곳 쌘호세와 오클런드를 잇는 880번 고속도로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노스트럼 랙이라는 대규모 가게에서 튼실한 구두 한 켤레를 열심히 고르고 있던 나는 또 다시 문득 경악해야만 했다.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수만 켤레나 될 법한 그 많은 신발들이 발끝에서 머리끝 높이까지 질서 정연하게 빽빽하게 들어선 수많은 진열 선반들 위에 그것도 모두 한 짝씩만 엄청 쌓여 있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거의 없는 듯이 끝도 없이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날의 구두 사냥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썩 내키는 게 없었다.
여담으로, 그날 그 가게를 빈 손으로 나오면서, 그 가게 한쪽 구석에 뚫린 창고문 앞에 한참 길게 늘어선, 신발을 양쪽 모두 신어보고 사려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즉 전세계에서 모여든 백인 흑인 황인 금발 흑발 적발 황발 청발 등등의 남녀노소장단 군상들과 특히 그들이 한결같이 손에 들고 있는 신발 한 짝씩의 다양성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
상상이 가는지 모르겠다. 마치, 어떤 무료 급식소 앞에 깡통 하나씩들 들고 주욱 한 줄로 늘어서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자기 차례를 마냥 순박하게 조용히 기다리는 것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모두들 하나같이 너무너무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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