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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ry For Me Argentina
에비타 에바 페론 ( Evita Eva Peron, 1919-1952, 아르헨티나 )

-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 에비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퍼스트레이디 - 에바 페론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 퍼스트 레이디(영부인)의 역할은 때로 애매한 것이다. 과거 왕정 시대라면 사회적으로 낮은 여성의 지위에 비해 왕후로서 직·간접적으로 정치 개입하는 등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겠으나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 퍼스트 레이디라는 것은 다만 대통령 혹은 총리의 부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자국 국민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추앙을 받은 퍼스트 레이디는 누구일까? 육영수, 재클린 케네디, 엘리노어 루즈벨트!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에비타, 에바 페론이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그녀의 무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헌화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녀는 그런 추앙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을까?

에바 두아르테 - 사생아로 태어나 대통령궁에 입성하다

에바 페론(Eva Peron)은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초원(팜파스)의 시골 마을 로스 톨도스(Los Toldos)에서 농장 주인과 농장의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에바의 어머니는 자신이 일하던 농장주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다섯을 낳았는데 에바는 그 중 네번째 아이였다. 굳이 홍길동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설움이 많았을 에바 두아르테는 15세 때 옷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들고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한다. 그러나 서울역에 갓 내렸을 1960년대의 영자가 그러했듯이 이 시골 처녀 에바에게도 낯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고향집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지닌 강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아야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가 가장 강한 무기임을 알았다. 그녀는 삼류 배우나마 배역을 따기 위해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초원에서 방목되는 육류와 곡물 수출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869년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6.9%의 높은 수준이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전체 도시들 가운데 뉴욕 다음의 대도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의 국민 1인당 GNP는 스페인·이탈리아·스웨덴·스위스보다 높았고, 독일이나 베네룩스 3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 대륙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에서 많은 이민이 유입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 노동자들은 그냥 가족만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화와 사상까지도 함께 신대륙 아르헨티나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운동과 그동안 대지주들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들의 요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페론주의의 등장과 아르헨티나

1916년 집권한 급진 시민당의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은 최저 임금제 실시·최대 노동시간 제한 등 소외 계층을 위한 복지제도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고, 이런 정부의 대책이 미흡하다고 느낀 노동자들은 좀 더 많은 조건을 들이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대륙의 전쟁과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는 친독(親獨)적 중립을 지켰다. 후안 페론은 1930년대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유럽에서 발흥하고 있던  파시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1943년 6월4일 「통일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과 함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후안 페론은 군사 정권 아래에서 대통령이 수 차례 교체되는 가운데 국방부 장관·노동부 장관·부통령 겸 노동복지 장관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했다. 정부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그는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의 한 갈래(독일의 나치당도 같은 맥락이다)라고 할 수 있는 페론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에바가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 25세 때 그녀보다 나이가 2배 가량 많았던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밀히를 즐기다가 곧 두 사람만의 은밀한 방을 구해 장기적인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에바는 힐러리가 빌 클린턴에게서 미래의 대통령 싹수를 발견한 것처럼 후안 페론에게서 미래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보았다. 그리고 힐러리가 그랬듯이 자신의 연인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친독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의 반정부 진영을 고무하면서 민정 이양을 요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파렐 발카르세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고, 강경파였던 후안 페론을 구금한다. 후안 페론이  연금당하자 타고난 미모와 달변을 가진 에바 페론을 비롯한 페론의 추종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페론 석방운동을 벌였고, 밤낮없이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사주하여 마침내 노조 총파업을 유도해내면서 후안 페론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준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준 정부(情婦) 에바에게 새삼 사랑과 신뢰를 느낀 후안 페론은 죽는 날까지 함께 하기를 맹세하고 결혼한다.
페론은 1946년 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54%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기존의 지지 세력이던 군부·교회는 물론 노동조합의 지지까지 확보하고, 노조 지도자 등 각 부문별 이익 집단의 대표들을 각료로 기용하는 등 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페론은 집권 후 페론주의를 내세우며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등을 추진하며 자립노선을 추구했다. 또한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 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이었다. 그는 취임 후 5개년 계획을 수립, 공공사업·교육 개혁·사회 개혁 등을 추진했다.

에바 페론·페론주의의 영광과 실패

페론의 정책은 대외 자립·공업 발전·사회 정의 추구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독립 이후 아르헨티나의 주요 산업이었던 농·축산업에 의존하던 아르헨티나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공업화를 추진하여 진정한 경제 자립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페론은 외국인 소유의 철도·전화 회사들을 국유화하고, 1947년 7월에는「경제독립」을 선언하면서 모든 외채를 청산했다. 페론이 노동자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노동입법을 추진한 것도 그 이면에는 노동자 계급의 소득 향상을 통해 내수를 진작시켜 아직 미약한 수준의 국내 공업 발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페론이 집권 초기에  이렇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식량 수요 증가로 농축산물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벌어들인 외화 덕분이었다. 이런 호황 속에서 추진된 개혁 입법들은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의 입김 속에서 추진된 일들이었고, 노동자와 여성, 빈민들은 그녀를 성녀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이 아름답고 총명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우호적인 그녀에게 열광했고 적극적인 지지와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페론의 공업화 정책은 레닌이 러시아에서 추진했던 중공업 정책과 달리 수입 대체 전략에 기초한 경공업·소비재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본재 수입의 증가로 외환 사정을 다시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 페론주의와 아르헨티나는 점차 독재의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1948년에 이르자 페론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정의주의(Justicialismo)」라고 포장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반대 세력에게는 유·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1951년에는 「정의주의 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 홍보에 나서도록 하기도 했다. 에바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사랑을 이용하여 남편과 자신을 포장해나갔고, 대중이 원하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선사하기도 했다. 에비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서 학교, 병원, 고아원을 단기간에 전국에 건립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병원 기차가 의료장비를 싣고 전국을 누비면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또한 에비타 재단은 지진 등 재해를 당한 나라에 거금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콜롬비아, 에콰도르 같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도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적 정책 덕분에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런 위세를 등에 엎고, 심지어는 초등학교에서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는 글짓기 숙제를 하도록 했으며,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는 에바의 자서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하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에서 퍼스트 퍼슨을 꿈꾼 에바 페론

에바 페론은 단순히 퍼스트레이디로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데 상징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정계의 핵심 요직에 올라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에 오르고자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