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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비 옮겨졌을 가능성 크다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 <TBODY> <TR> <TD class=read_body>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1부와 2부로 나누어 며칠 간격으로 게재합니다. <BR><BR><STRONG>(1부) 태왕비 위치에 대한 의혹제기<BR>(2부) 옮긴 이유와 비문위조의 이유 분석 </STRONG><BR><BR>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비가 우뚝 서있다. 광개토태왕의 원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이 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 비(碑)이다.  <BR><BR> <TABLE cellSpacing=2 width=388 align=left border=0> <TBODY> <TR> <TD> <TABLE cellSpacing=1 cellPadding=0 bgColor=#666666 border=0> <TBODY> <TR> <TD bgColor=#ffffff><IMG src="http://www.pluskorea.net/imgdata/pluskorea_net/200803/2008030756263873.jpg" width=388 border=0></TD></TR></TBODY></TABLE>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2 width="100%" border=0> <TBODY> <TR> <TD style="FONT-SIZE: 9pt; COLOR: #777777; LINE-HEIGHT: 12pt; FONT-FAMILY: verdana,굴림; LETTER-SPACING: -1px" bgColor=#e8e8e8>▲  1927년 부터는 이층누각을 세워 비문과 위치가 조작된 비를 보호했다.</TD></TR></TBODY></TABLE></TD></TR></TBODY></TABLE>비는 1876~80년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지고, 200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BR><BR>비의 높이는 6.34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대석)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15~20cm로 고르지 않다. <BR><BR>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BR><BR> <TABLE cellSpacing=2 width=578 align=center border=0> <TBODY> <TR> <TD> <TABLE cellSpacing=1 cellPadding=0 bgColor=#666666 border=0> <TBODY> <TR> <TD bgColor=#ffffff><IMG style="WIDTH: 569px; HEIGHT: 606px" height=432 src="http://www.pluskorea.net/imgdata/pluskorea_net/200803/2008030757304755.jpg" width=578 border=0></TD></TR></TBODY></TABLE>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2 width="100%" border=0> <TBODY> <TR> <TD style="FONT-SIZE: 9pt; COLOR: #777777; LINE-HEIGHT: 12pt; FONT-FAMILY: verdana,굴림; LETTER-SPACING: -1px" bgColor=#e8e8e8>▲  광개토태왕 비의 제원.  받침대가 3면으로만 되어있고, 작아서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TD></TR></TBODY></TABLE></TD></TR></TBODY></TABLE><STRONG><FONT color=blue></FONT></STRONG> <BR><STRONG><FONT color=blue>여하튼 이 광개토태왕 비는 우리 고대사의 숙제를 풀어줄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치가 분명 옮겨진 것 같은 의혹이 있고, 일제가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부분을 조상의 수치로 여겨 전부 훼손해 버렸고, 이 비문을 일부 위조해 조선 침략의 정당성의 이론이 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기도 했다. <BR></FONT></STRONG><BR><STRONG><FONT color=red>그러나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한반도에는 백제/신라가 없었고, 일본의 전신인 왜가 있었던 위치도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남쪽 광동성이나 가까운 섬이었음이 밝혀짐으로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FONT></STRONG> 그런데 이 비는 비문 조작뿐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의문이 있다.<BR><BR> <TABLE cellSpacing=2 width=578 align=center border=0> <TBODY> <TR> <TD> <TABLE cellSpacing=1 cellPadding=0 bgColor=#666666 border=0> <TBODY> <TR> <TD bgColor=#ffffff><IMG src="http://www.pluskorea.net/imgdata/pluskorea_net/200803/2008030703432748.jpg" width=578 border=0></TD></TR></TBODY></TABLE>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2 width="100%" border=0> <TBODY> <TR> <TD style="FONT-SIZE: 9pt; COLOR: #777777; LINE-HEIGHT: 12pt; FONT-FAMILY: verdana,굴림; LETTER-SPACING: -1px" bgColor=#e8e8e8>▲  좌측은 일본서기 628~709년의 일식분석으로, 당시 왜는 중국대륙 남단이나 남지나 해상의 섬에 있었다. 우측은 1189년 이후의 일식분석으로 정확히 일본열도이다. 628년 이전은 일본이 아니라 왜였으나 백제의 분국이나 마찬가지로 삼국과 같은 독자적인 국가로 보기 어렵다. </TD></TR></TBODY></TABLE></TD></TR></TBODY></TABLE><STRONG></STRONG> <BR><STRONG>1) 비에 대한 기록이 왜 없을까? <BR></STRONG><BR>처음 비가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리의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서에 아래와 같이 압록강 건너 집안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BR><BR> <TABLE cellSpacing=2 width=251 align=left border=0> <TBODY> <TR> <TD> <TABLE cellSpacing=1 cellPadding=0 bgColor=#666666 border=0> <TBODY> <TR> <TD bgColor=#ffffff><IMG src="http://www.pluskorea.net/imgdata/pluskorea_net/200803/200803071150901.jpg" width=251 border=0></TD></TR></TBODY></TABLE>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2 width="100%" border=0> <TBODY> <TR> <TD style="FONT-SIZE: 9pt; COLOR: #777777; LINE-HEIGHT: 12pt; FONT-FAMILY: verdana,굴림; LETTER-SPACING: -1px" bgColor=#e8e8e8>▲  근처 아불란사 터에 있는 높이 3~4m의 이 대석이 우리 기록에서 언급한 대금황제능비로 보인다. </TD></TR></TBODY></TABLE></TD></TR></TBODY></TABLE><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BR><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BR>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BR><BR><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 <BR><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BR>만포 삼십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BR><BR><강계읍지 : 1830년 찬 1872년 교정> <BR><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 在皇城平上一里許 有立碑. 高可十丈. (금나라 초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는 내용 외에는 위의 기록과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BR><BR>1830년에 편찬되고 1872년에 교정된 강계읍지에도 분명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호태왕 비가 발견된 근처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다. 필자는 이 석주가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생각된다. <BR>물론 10장(丈)의 높이가 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1장을 3m라 했으니 약 30m 정도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10척(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