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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석작가의 병영일기 연재(6회)] 서울, 논산, 광주..후레바를 기억하십니까?
후레바를 기억하십니까 추석 전에 넘기기로 한 원고의 청탁 시점이 워낙 넉넉해서 룰루랄라 하다 보니 추석이 코밑에 들이닥쳐 있더군요. 어맛 뜨거랏! 허둥지둥 쓰다 보니 원고는 더 안 되고...... 겨우 토요일에 넘겼습니다. 연재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제 게으름 탓이라는 부끄러운 고백을 접수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약속했던 제목이 <후레바를 기억하십니까?>였었죠? 예비사단 출신들은 후레바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논산 출신들만이 기억하는 이름입니다. 아, 후레바.......아아, 염병할 그 놈의 후레바! <후레바를 기억하십니까?> 버어나드 쇼오는 \'스포츠라는 이름의 살상행위 (Sport for killing)\'란 에세이를 통해 사냥이라는 스포츠로 짐승을 살상하는 인간의 잔학하고도 야만적인 심리와 유목민의 전통을 신랄하게 비난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전쟁론>을 쓴 카를 폰 크라우제비츠는 군인은 살인을 훈련받은 인간으로 단언한 바 있다. 양심이나 이성의 가책없이 적이라는 이름의 인간을 살상해야 하는 군인...... 평범한 인간과 다른 군인을 만들어내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4주였다. \"기상!\"으로 시작되는 훈병의 하루 일과는 항상 눈코들 새 없이 바빴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박두진 시인이 작사한 군가는 아침 점호때마다 불리워졌고, 고향 예배라는 행위는 고향 쪽을 향하여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인 채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절차였는데, 얼마 동안은 현재의 위치가 불명확해 도대체 서울쪽을 몰라 같은 서울 출신들이면서도 고향 예배의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점호를 마치면 구보를 하고 돌아오면 대강 7시 전후가 되고, 막사 주변과 내무반 청소를 마치고 세수를 하고 나면 아침 식사 시간은 08시. 식사당번들이 식당에서 타온 밥과 국, 김치 한 조각을 배식받고 \"식사 시작!\"이란 내무반장의 고함에 \"감사히 먹겠습니다!\"를 외치고 먹는 시간은 고작해야 10분 정도. 왜 그리도 옆에 앉은 동료들의 밥이 내 밥보다 많아 보이던지..... 딱부리 내무반장이 기분이라도 나쁘면 두어 수저 먹기도 전에 \"식사끝, 동작 그만!\" 누군가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어서서 원산폭격을 해야 했고, 배가 고프면서도 식사당번들이 들고 지나가는 식깡에 밥과 국, 김치들을 쏟아부어야 했다. \"삼천리 뒤흔드는 부름이 있어 너도나도 연무대에 서로 모여서.....\" \'논산훈련소가\'를 부르며 교육장으로 가던 우리들의 모습이 지금도 회색빛으로 기억된다. 마음이 회색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지급된 훈련복이 여늬 군복과 다른 회색천이었고 앞가슴 오른쪽부분에는 뻣뻣한 검은 텐트지가 이중으로 부착되어 그랬을 것이다. 교육장에서는 물론 교육장을 오가면서도 항상 스스로를 독려하고 있었다.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자!\" 길이가 1m인 엠원 소총이 지급되고 분해와 조립을 익히며 시작된 \"피가 나고 알이 배고 아이 씨팔 소리가 절로 나오는\" PRI 1단계에서 우리는 앉아 쏴, 서서 쏴, 엎드려 쏴! 등으로 땅바닥에 딩굴어 흙강아지 되기 일쑤였다. 그때쯤 우리는 논산훈련소 사파의 세계에 점차 길들여져 갔다. \"가고파. 보고파, 먹고파, 자고파\"   훈련소 생활이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내무반에 첫편지가 도착했다. 서너 통의 첫편지 묶음에는 내 편지도 있었다. 정규 사이즈 보다 작게 직접 만든 봉투에는 (당시에는 규격봉투 제도가 없었다) 역시 여늬 편지지보다 작은 종이의 첫 문장은 \"군군 아저씨도 안녕\"이었고, 마지막 문장은 \"나도 안녕!\"이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입영전야에 만났던, 그리고 눈발이 날리는 화전역에 서 있었던 옅은 노란색 버버리였다. 내무반에서 첫편지를 받은 서너 명은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편지를 큰소리로 읽어야 했다. 다른 편지와는 다른 간략한 문장이었지만 요즘 말로는 튀는 문장이어서 당장 나는 동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훈련병들의 이름이 적힌 편지들이 내무반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석 점호 때마다 나의 왼쪽에는 체격이 넓적하고 순해보이는 서른이 넘은 전라도 사내가 서있었다. 그는 늘 암기사항 때문에 지적을 받고 힘들어 했다. 나이 때문에 그를 나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저씨는 \"식당 사역병 O명 차출!\"이라는 전달병의 외침이 들리면 총알같이 달려나가곤 했다. 사역병이라는 말 자체가 괴로운 것이었고, 식당 사역병은 더더욱 끌려가기 싫은 차출이었음에도 그는 즐겨 달려나가곤 했었다. 그의 즐거움을 깨달은 것은 얼마가 지나서였다. 일석점호가 끝나고 메트리스를 깔고 나란히 누운 다음 불이 꺼지고 냄새나는 모포 밑에 피곤한 몸을 눕힌 내 손을 더듬는 그의 손. (이상한 상상은 금물!) 내 손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누릉지가 전해졌다. 식당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의 배에는 항상 누릉지가 둘러져 있었고, 과중한 훈련으로 먹고파에 시달리는 훈련병 중의 하나인 나는 냄새나는 모포 속에서 그와 나란히 오도독 오도독 누릉지를 씹곤 했었다. 아저씨에게도 편지가 왔다. 한가한 일요일 팡세를 읽고 있는 나를 아저씨는 할말이 있다며 아직도 햇살이 따스한 양지를 피해 막사 뒤쪽으로 데려갔다. 그는 편지를 내밀며 수줍게 말했다. \"김훈병, 나 좀 읽어줘!\" 그는 문맹이었다. 부인도 역시 문맹이어서 동네 이장이 대필해줬다는 편지로 농사를 짓다가 \'삼천리 뒤흔드는 부름\'에 더 이상 외면하면 기피자가 되는 위기로 할 수 없어 입대했고 그에게는 아직 학교에 가지 않은 딸이 셋이나 있었다.   편지를 읽은 덕분에 답장도 써줘야 했다. 그가 부르는 내용은 아무개 잘 있느냐가 고향에 남겨진 사람 머리수 만큼 이어지다가 나는 훈련 건강하기 잘 받고 있으니 다시 아무개도 아무개도 아무개도 잘 있어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아저씨의 구술대로 쓴다면 같은 내용의 반복일 수밖에 없어서 대필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동일한 환경 속에서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 있느냐, 있어라 사이사이에 살을 붙여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다. 그날 저녁 아저씨는 모포 밑으로 누릉지가 아닌 다른 것을 전해줬다. 편지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준 데 대한 감사였다. 후레바였다. 후레바! 논산훈련소 PX에서 파는 피로회복제 후레바! 피로회복제로 대변되는 박카스는 논산훈련소에 없었다. 그리고 논산훈련소를 떠난 뒤, 단 한번도 그 후레바를 본 기억이 없다. 아아, 후레바! 그 후레바가 내 논산훈련소 생활을 바꾸게 될 줄은 그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아저씨는 며칠 뒤에 또 후레바를 내밀며 편지 대필을 부탁했다. 이번 편지는 가족이 아니었다. 아저씨의 애인에게였다. 새벽밥을 먹고 가족과 동네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나온 아저씨는 기차를 타자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이흥렬 선생의 \'바위고개\'에서처럼 아저씨의 애인은 고개마루 바위 뒤에 숨어 이미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온기가 남은 닭백숙을 냄비째 보자기에 싸서 내밀며 기차간에서 먹으라시던 그 님....... 그 정성이 눈물겨워 차마 그냥 올 수 없어 숲에서 바쁘게 사랑을 나누고 헤어져 온 그 님. 아저씨의 그 애인에게 나는 아저씨가 되어 정성을 다해 달콤한 편지를 써줬다. 아마 이제까지 내가 쓴 편지 가운데 가장 유치 찬란한 단어로 뜨거운 사랑을 전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알았다, 불륜의 사랑이 얼마나 유치 찬란한 것인지를........ 지금도 이흥렬의 <바위고개>를 들으면 그 아저씨가  생각난다. 그 님도 지금은 어언 60이 넘었을텐데...... <계속> 한가위가 즐거우시기를......... '>